[독후감] 헤르만 헤세 데미안
1. 제목 및 표지를 보고 감상
표지에 한 여자아이가 있어서 주인공인 줄 알았다. 또한 데미안이 주인공의 이름인 줄 알았다. 표지의 여자아이가 빨간 머리(Ginger Hair)로 표현되어 있어 이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서양에서 빨간 머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별 시답지 않은 편견이 있는 걸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독후감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회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히 몇 살인지 모르는 싱클레어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찬찬히 이야기를 하면서 전개해나간다. 즉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다. 굳이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이에 나름대로 해답을 내려봤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설정해두고 그 시점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시점을 설정한 사람의 의도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성장함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어 통시적인 개념으로 회고를 듣게 되는 독자들은 변천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데미안을 읽으며 남은 감상 포인트 세 가지가 있다. 싱클레어의 거짓말과 에리히 프롬의 사랑 그리고 생각하는 힘이다. 싱클레어는 왜 크로머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그리고 왜 점점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싱클레어의 형편에 2마르크는 큰돈이 아닐 텐데 말이다. 부모님에게 실토하지 않는 걸까? 사실 왜라는 접근은 필요가 없었다. 크던 작던 어렸을 때 한 번쯤 이런 경험은 다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느 날 등굣길에 늦은 적이 있었다. 지각을 하면 교실 문을 열었을 때 친구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배가 아프타고 엄살을 부렸다. 꾀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혼을 내며 나를 학교로 내몰았다. 나는 그렇게 학교를 행하지 않고 단지를 배회했다. 아빠는 직장동료와 함께 급히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아이가 활동범위가 넓지 않아서 찾기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잡히고 나서 집에 들어가면 혼날게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는 척하면서 아파트 계단으로 맨 꼭대기 층으로 갔다. 결국 또 잡혀서 집에 들어갔다. 예상과 다르게 혼나지도 않았고 최근 가장 상냥한 부모님의 모습을 경험했다. 다음날 학교 가기 무서웠지만 아무도 관심 없듯 일상처럼 나를 맞이해주었다.
싱클레어의 거짓말의 굴레에서 꺼내 준 것은 데미안이었다. 굳이 나의 경우를 따지자면 아파트 경비아저씨일 것이다.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싱클레어를 구원해주었다. 그런데 과연 이게 정녕 싱클레어 혹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자기 스스로 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는 삶이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중요한 건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다. 과연 그 상황에서 싱클레어는 스스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싱클레어 성격에 크로머의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것보다 타인의 힘을 빌려 일단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기 인생의 문제를 오로지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도움이나 부탁 또한 하는 것을 꺼려하는 내가 쉬운 길을 굳이 멀리 어렵게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저번 독서모임에서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었다. 폭넓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서 데미안과 더불어 기억이 나는 것은 인간의 창조물인 자본주의와 산업화였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점점 죽어있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고 했고 이것이 결국 무관심으로 발전한다 했다. 후반부에 데미안이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가는 정확히 알고 있지만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법도 알지 못하고" 결국 우리 사회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는 부분이었다. 이 대목에서 이 소설에서 싱클레어의 이해할 수 없는 독백과 사색이 왜 이리 많은지 이해 할 수 있었다. 싱클레어는 우리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인식하고 싶었으며 그 세상에서 나의 태도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말이다. 시점이 한참 과거인 줄 말 았았던 소설이 산업화와 물질주의,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초점이 올바르게 잡히면서 시사점도 찾을 수 있었다. 에리히 프롬과 헤르만 헤세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그렇게 분류할 수도 있다. 어쩌면 에리히 프롬과 헤르만 헤세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오직 두 번의 경우이지만 귀납적으로 인식해서 가치 있는 고민이겠구나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힘이다. 마지막 데미안의 죽음으로 싱클레어는 홀로서기를 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난다. 싱클레어 곁에는 데미안 말고 많은 사람이 오갔다. 오르간 연주자였던 피스토리우스, 싱클레어를 경외하다 실망한 크나우어, 데미안의 어머니인 애바 부인. 이들은 싱클레어의 유년시절의 성장에 도움을 준 굵직한 인물들이다. 데미안에서 이야기해주고 싶은 주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면 이번에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해 주는 부분이었다. 싱클레어는 감사하게도 좋은 인연들을 만났고 탈선의 길을 걸어갔지만 다시 돌아왔다. 오히려 탈선했던 것이 자양분이 되는 듯했다. 어쩌면 신으로 일컫는 아프락사스의 은유가 사색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것이지 아닐까 싶었다. 아프락사스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국 싱클레어가 어렸을 때부터 소설의 현재까지 여러 사람을 훑어가며 생각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결국 싱클레어는 제2의 크로머가 등장하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데미안이 없이도 말이다. 우리도 싱클레어의 성장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색을 멈추지 않는 사람으로.
3. 인상 깊은 구절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와 함께 있을 때
"불을 응시한다는 것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유익하고 풍요로운 느낌을 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감탄하는 능력을 잃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대목에서 에리히 프롬과 헤르만 헤세를 이어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