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책방/독후감

품위를 지키려는 영국 집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혼란스러운 20세기 유럽사회 『가즈오 이시구로 - 남아 있는 나날』

소한초이 2025. 1. 7. 01:33
반응형

1. 고정관념

 
이번에 읽은 <남아 있는 나날>은 독서모임에서 휴식과 쉼이라는 키워드로 데이나님이 선정한 책이었다. 그 키워드와 작가의 이름은 오히려 초벌 읽기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책 표지에 제목과 작가의 이름은 가히 일본문학일 것 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 예상은 깨지게 된 것이 프롤로그의 제목인 달링턴 홀 때문이었다. 하지만 줄곧 책을 읽으면서도 휴식과 쉼이라는 키워드에 본문 내용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 책 속 내용 중에 휴식과 쉼에 대한 부분이 어떤 점이 있을까? 생각해 왔다. 결론은 키워드와 상관없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일전에 키워드로 책을 고르기 힘들면 굳이 키워드에 맞춰서 책을 선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이 났다. 혹시 데이나님이 키워드에 구애받지 않고 이 책을 골랐을까? 
 
초벌 읽기로 이 책의 대략적인 내용과 주제를 파악하고 두 번째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읽기 전 고정관념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대부분 그런 식으로 책을 접하게 될 것이다. 충분히 그런 고정관념을 피해서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고 이제껏 그 편견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편협한 독서가 되었다는 생각에 두 번 놀랐다. 
 

 

2.독후감

 
주인공 스티븐스는 영국 옥스퍼드셔 달링턴 홀에서 일하는 집사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섬기던 달링턴이 죽고 미국인 패러데이가 달링턴 홀의 주인이 되며 그를 섬기게 된다. 미국 출신인 패러데이를 모시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의 문화차이는 생각보다 그에게 크게 느껴졌다. 그와 중에 패러데이는 스티븐스에게 휴가를 선물해 주며 영국의 아름다운 곳들을 누벼보라고 이야기한다. 스티븐스는 그 휴가를 부담스럽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과거 같이 일했던 켄턴 양을 찾아 콘월로 떠나기로 한다. 이 소설은 스티븐스가 켄턴 양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 과거를 회상하며 집사라는 직업의식과 그 숭고함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위대한 집사는 무엇인가?"와 그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 "품위는 무엇인가" 이 두 질문으로 집사인 스티븐스의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해 준다. 그는 그와 같이 집사인 부친의 예시를 들며 품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주인을 욕된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본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감추고 공과 사를 구분한다. 그러면서 위대한 집사와 유능한 집사는 구분된다고 강조했다.
 
켄턴 양이 있는 콘월을 마땅한 휴가지로 점찍어 둔 이유는 그곳을 찾아가며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고 스스로 반문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읽었을 때는 켄턴 양에게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 그런 줄 만 알았다. 그런 감정을 일찍이 패러데이는 알아차렸고 스티븐스를 떠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켄턴 양은 스티븐스와 함께 일하면서 마치 직장 내 괴롭힘만 당한 것으로만 보인다. 설사 스티븐스가 켄턴 양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속내는 밝히지 않고 줄 곧 불친절한 티만 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게 호감의 표시로 괴롭히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스티븐스는 켄턴 양에게 항상 집사의 품격을 기반으로 한 직업의식으로 불편하게 했다. 그때 가장 그가 위대한 집사가 되고 싶어 할 때였고 그의 바람대로 위대한 집사였다. 떠나간 켄턴 양이 돌아오면 위대한 집사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달링턴의 위대한 집사는 지나갔고 패러데이를 모시게 되었을 때 그 위대함과 품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소설 속 시대상 단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베르사유 조약을 주제로 의견을 나누는 장면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링턴 홀에는 국내외 귀빈들이 많이 찾아왔고 그 공간에서 소위 이른바 큰일을 도모했다. 베르사유 조약을 재검토하자는 자리에서 달링턴과 유럽인사들은 독일에 온건한 편이었고 미국에서 온 루이스는 강경한 편이었다. 루이스는 달링턴에게 이상주의자 같은 "아마추어"라고 표현했고 달링턴은 그것을 "명예"라고 설명했다.
 
결국 달링턴은 반유대주의에 빠지기도 했고 파시즘에 영향받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나치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도 스티븐스는 주인인 달링턴의 뜻을 따라 보필하는 것이 그의 본분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직업정신이고 주인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달링턴의 대자인 카디널과 대화를 통해 스티븐스가 잘 못 생각하는 것이고 사실은 이렇고 정녕 달링턴을 위하는 일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된다고 듣게 된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집사의 품위를 잃고 싶지 않아 했다. 소설에서 그려내는 과거는 전쟁이 발발이 되는 1939년 이전까지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역사를 통해 사실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고 있음으로 달링턴의 미래가 어떠했는지 쉽게 그려볼 수 있다.
 
스티븐스는 아무리 카디널이 달링턴이 히틀러의 선전 도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달링턴이 해온 큰일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에 승리감을 느끼고 그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기 애썼다고 표현한다. 달링턴과 비슷한 높으신 귀족 인사들은 중우정치를 우려해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감과 불만을 표하고 있고 마치 의사결정이 전체주의를 동경하는 듯 하기도 했다. 달링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스티븐스는 그 조차도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자동차의 바퀴였으며 무심하게 그 역할을 잘 수행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아이히만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그는 법과 규정에 충실히 따랐고 그러므로 죄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판결문에는 여러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으므로 직접 사람을 죽이고 죽이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 법과 규정 그리고 사상 그리고 명령이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맥락이다. 소설 속 스티븐스는 과연 무엇에 취해있었던 것일까? 그가 품고 있는 위대한 집사와 그의 품위, 명예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소설은 전쟁범죄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스티븐스는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를 만나고 휴가를 받아 콘웰에서 켄턴 양을 만났다. 켄턴 양을 떠나보내고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은 품위가 무슨 소용이었나 책망하는 스티븐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을 때"라고 말이다. 그 말에 스티븐스는 어떻게 하면 패러데이가 만족할 만한 집사가 될지 희망을 품는다. 
 
설사 과거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을지라도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메시지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스티븐스의 여행이다. 그 여행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며 과거를 회상하게 되고 그가 어떤 것에 빠져들었는지 곱씹어보게 된다. 이제껏 그는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놓친 것들이 많았다. 사소하게는 켄턴 양의 마음부터 크게는 달링턴의 앞날이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놓치지 않으면 된다. 노인이 이야기해 준 것처럼 스티븐스는 끝이 아니라 여생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패러데이를 위해 과거와 다르고 바른 위대한 집사가 되면 되는 것이다. 이 사회에 악의 보통성에 가담한 사람이 얼마나 있고 죄책감에 빠져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그들의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 생각해 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