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책방/독후감

환자들의 삶을 살펴보는 신경심리학 임상 보고서 『올리버 색스 - 아내를 모자로 착각 한 남자』

소한초이 2024. 6. 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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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기 전 제목에 대한 감상

 
어떠한 에피소드를 담긴 이야기 일 것 만 같았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했다는 남자의 이야기로 말이다. 신박한 설정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소설이 아니라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이번에도 또 소설을 읽지 못한다니 머리가 지끈해진다.
 

 

2. 독후감

 
이 글을 써보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프롤로그를 몇 번이나 읽어 본 지 모르겠다. 올리버 색스가 전하고 싶은 말이 정녕 무엇일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왜곡하여 독서모임에 간다면 이 책을 고른 당사자 입장에서 부끄러워질 것 같았다. 올리버 색스는 신경과 의사이다. 그가 여러 차례 환자들과 함께하면서 느껴왔던 것은 과연 병력에 대해서 기술할 때 그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기록한 것일까? 에 대한 의문을 느껴왔다. 그는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병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주며 니체[와 비슷하게 병 없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다. 프롤로그를 통해서 내가 받은 메시지는 정신병자의 삶을 살펴보기였다. 그저 그들의 병력뿐만 아니라 삶으로서 말이다.
 
군대를 가기 전 아버지 일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그때 전라북도 어느 시골마을에 찾아가게 됐다.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무턱대고 우리에게 욕을 하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마을 어느 누구도 그에게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본인이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어기제로 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속담처럼 나도 그냥 그 자리를 피한 경험이 기억난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고등학생 때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주변지역 학교 중에 유일하게 지적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받아 줄 수 있는 특수학급이 있는 학교였다. 그 친구들은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특수학급 수업도 소화한다. 각기 다른 병세로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 친구들과 벽을 세우며 지내왔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런 취급이 인종차별 같은 차별 일지도 모르겠다. 지적장애 친구와 점심을 같이 먹거나 무리에 끼워주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그저 학교 측에서 인정해 주는 봉사시간으로 그들과 함께 밥 먹으며 시간을 같이 보낼 뿐이다. 그 친구들은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며 하나의 놀잇감이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는 많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4개의 목차로 분류하며 에피소드를 구분하는데 상실, 과잉, 이행 그리고 단순함의 세계가 있다. 영어 목차도 소개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이행이라는 말이 생경했기 때문이다. 영문은 Losses, Excesses, Transports, The World of Simple이다. 목차 제목에 맞게 구성된 환자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P선생은 상실에 배치되어 있다. 과잉에는 틱과 뚜렛 증후군과 같은 환자, 이행에는 마치 회상을 하는 듯한 환자들을 다루고, 마지막은 바보 같아 보이는 천재를 볼 수 있다.
 
세상은 너무나도 비장애인 그리고 다수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책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과잉>에 레이, <이행>에 C부인, <단순함>에 리베카 이들을 보고 느낀 것은 우리 사회가 그들을 포용하려는 생각보다 교화하려는 생각이 더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이는 뚜렛증후군 환자다. 그 병세를 가지고 놀라운 음악적 능력과 민첩한 순발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병세를 호전시키고자 할로페리돌을 복용하면 그의 천재적인 능력은 없어지고 차분해지며 온전히 회사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다. C부인은 자꾸 과거 들었던 노래들이 머릿속에 맴돈다. 발작을 통해 인생의 생기를 찾은 그녀에게는 병이 곧 건강이고 병 걸리는 것이 치료되는 길이라 느낀다. 리베카는 지적장애를 가진 소녀이지만 놀랍게도 뛰어난 시인이었다. 발달 및 인지능력을 촉진해주고자 한 노력들은 그녀에게 시인의 모습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인지능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이 아닌데 그녀의 특기만 사라져 버린 느낌인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보면 천재의 특이함을 이 사회가 수용하지 못하면 그들이 주는 유익을 얻지 못한다라는 비슷한 말이 있다. 이처럼 레이의 음악적 감각과 민첩함으로 재즈음악을 더 아름답게 들을 수 있거나 리베카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시에 감동받을 수 있다. 하지만 레이는 할로페리돌이 없으면 안 되는 뚜렛 증후군 환자이고 리베카는 지적장애인이다. 우리 주변에 그들을 쉽게 볼 수 없는 것은 어딘가에 수용되어 격리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천재라고 칭할 수 있으면 우리는 그들이 줄 수 있는 유익을 하나도 얻지 못하는 상태인 셈이다. 어느 예술가는 음악적 또는 미술적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수면제 종류인 졸피뎀을 먹었다고 한다. 더 위법적인 행태들은 그런 이유로 마약을 찾는 것인데 그럴 거면 차라리 레이와 리베카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몇 달 전 독서모임을 통해서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라는 책을 읽었었다. 시각장애인을 주변에서 볼 수 없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학창 시절을 같이 했던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저 잊혀 가는 고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이라고 분류해야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적장애인 친구라서 외면한 것일까? 올리버 색스는 동물들의 병과 인간들의 병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병력과 더불어서 그들의 서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들의 병세에만 집중하고 삶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날들로 커다란 공백으로 남게 되었다. 그 공백을 어떻게 채울지는 관건이지만 올리버 색스가 레이를 진찰 한 다음 날 뚜렛 증후군 환자 세 명을 발견했듯이 나의 일상이 시각이 올바르게 변화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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