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김탁환 작가의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를 읽고

1. 읽기 전 감상


책을 읽기도 전에 제목을 보고 “과연 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왔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제목의 첫인상은 결코 시시한 내용은 아닐거라는 기대를 품게 해주었다. 제목에서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라 했다. 어떠한 상태보다 지키는 것이 걸맞다고 이야기 하는 걸까? 그렇다 그 말대로 아름다움은 누구로부터 부여 받는 것보다 스스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누군가에 의한 아름다움은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에 의한 것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가진 당신이라면 그것을 지키고 싶어도 쉽게 지킬수 없다. 시작부터 내것이 아니라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 할 수 있는 이치이다. 그렇지만 지킬 수 있는 아름다움은 그와 정반대다. 지킬수 있는 아름다움은 본인의 내면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아름다움을 뺏으려고 해도 쉽게 뺏을 수 없다. 그 속성 자체가 자기자신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았는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아름다움 도대체 뭘까? 지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이해하려고 보면 뷰티 인사이드가 아닐까 싶다. 영화도 있지 않은가 여러 모습을 하고있는 한 남자지만 사랑하는 건 무엇보다도 외모가 아닌 내면의 모습들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

독후감 제목: 일찍 맞이한 봄
도서명/저자 :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김탁환


2. 독후감


곡성의 미실란(米實蘭)에서 나는 일찍 봄을 맞이했다. 도시 환경에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내기에 미실란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녹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항상 겨울이었다는 것을.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지 몰랐다. 좋은 경치를 보고도 좋은지 몰랐다. 입력 대비 출력은 효율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이처럼 내 마음은 효율이 낮은 채로 겨울에만 머물러 있었다. 김영하 작가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어 보면 김 작가는 바쁜 일상을 접어두고 안식년을 가졌다 한다. 그 이후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서 방송 PD가 그동안 가고 싶은 곳이 있었냐고 질문했을 때 김 작가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과 더불어 마땅한 설명은 없었다. 사실 하고 싶은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다. 이처럼 나도 누군가가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곡성이라 말하겠다. 이번에 곡성을 다녀왔지만, 또 곡성에 가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비로소 김영하 작가의 즉흥적인 대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계획 없이 내 마음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저자인 김탁환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 중 하나지 아닐까 싶다.



가정 형편상 우리 가족은 자주 이사를 했다. 친할아버지댁인 전남 ㅇㅇ군 ㅇㅇ면에서 유치원을 다니고 외할아버지댁인 경북 ㅇㅇ시 ㅇㅇ읍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내가 다녔던 ㅇㅇ초등학교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누가 보더라도 시골스러운 학교였다. 부모님은 이 시기를 우리 가족의 암흑기라 평가하지만 나는 반대로 황금기라고 표현한다. 아버지가 자라왔던 동네를 누비고 어머니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서로의 유년 시절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후 우리 가족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중간지대인 ㅇㅇ에 정착했다. TV 속에서만 보던 현대인들의 모습인 도시 생활을 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전까지 한 반에 5명이었던 학급에서 30명이 넘는 학급에 여러 반이 있는 학교로 옮긴 나는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촌티를 벗어내지 못한 것이 티가 났는지 같은 반 친구들은 나를 놀려댔고 그런 게 왕따라는 것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다행히 좋은 짝꿍을 만나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때의 신선한 충격과 불쾌함은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총 11년을 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시골 초등학교 입학으로 시작한 학창 시절이었지만 11년의 세월은 나를 도시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바삐 움직이는 도심 속에서 나의 학창 시절 또한 그 속성에 맞춰 움직였다. 이에 동반되는 건 알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쉽게 떨칠 수 없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레 진전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바람과 다르게 그 골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누구나 가고 싶지 않고 좋은 평가가 만무할 군 복무 기간은 나에게 재정비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2년 안에서만 그랬고 전역하고 나서는 그전과 달라진 게 없이 되돌아갔다. 오히려 취업전선이 코앞으로 다가와 불안은 더 가중되었다.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 노력은 당장의 성과에 큰 효과를 낸다. 그 노력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학생 때 걱정했던 고민은 직장인이 되면 자유 해질 줄 알았다. 드디어 나도 그렇게 고대하던 어른의 삶에 편입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은 표면적이었고 그 전과 마찬가지로 어른의 삶에 가까워진 것보다 그것에 대한 고민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항상 나는 한 도시를 평가하고자 할 때 스타벅스 지점 수를 기준으로 삼는다. 반평생을 살아온 ㅇㅇ에서는 스타벅스 지점 수가 궁금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기준으로 헤아리지 않아도 대도시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ㅇㅇ은 ㅇㅇ 인구의 1/10인 15만 정도이고 스타벅스도 단 1개다. 그런데도 ㅇㅇ에 정이 가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회사 입사지원서를 제출할 때 근무지를 ㅇㅇ과 ㅇㅇ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인구수로 보면 ㅇㅇ은 3.33배이고 스타벅스 지점 수도 13개인 ㅇㅇ을 선택하는 것이 어쩌면 ㅇㅇ광역시 시민으로서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보시다시피 나는 이곳 ㅇㅇ에 안주하고 있다.

부서 배치를 받고 회사 메일을 통해 서면으로 회사 선배님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의 고향 전라도로 다시 왔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같은 전라도라도 본인은 서해를 바라보고 자랐다면서 남해에 있는 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시곤 했습니다. 논리적으로 그럴지 몰라도 아버지의 고향 전라도에 온 것이 기쁩니다.” 이 자기소개가 내가 ㅇㅇ이 아닌 ㅇㅇ을 근무지로 선택한 이유다. 어머니의 고향이 경북이라 이와 같은 이유로 보자면 ㅇㅇ을 선택할 수 있었겠지만 내가 가부장적인지는 몰라도 핏줄이 이끄는 대로 그냥 전라도가 더 좋았다.

비록 스타벅스는 1개 밖에 없지만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을 이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차가 없으면 돌아다니기에 불편하다. 하지만 때론 그 불편함이 여유로움을 가져다준다. 대중교통으로 이곳저곳 갈 수 있는 대도시에서는 어디를 가든 항상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한 공간을 독점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ㅇㅇ에서 가질 수 없던 나만의 공간을 이곳 ㅇㅇ에서 독점하고 있다. 이 특권은 당연히 대도시 사람보다 소도시 사람들이 누리기 쉽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공간에서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 축복 속에 있는 나는 ㅇㅇ시에 감사하다.

시골에서 대도시로 다시 소도시인 ㅇㅇ으로 왔다. 촌뜨기였던 내가 11년의 도시 생활로 나름 도시인이 되었지만 남는 건 바삐 움직이는 삶과 불안한 마음뿐이었다. 그 도시에서의 삶 속에서 터전을 변화시킨 나는 그제야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8살 때 논두렁에서 무당개구리를 잡고 놀았던 기억 그대로 재연할 수 없지만 눈 뜨고 밖을 나서면 산과 바다를 쉽게 볼 수 있는 지금은 그 추억을 바로잡는데 충분하다. 비로소 아버지의 고향 전라도로 그리고 ㅇㅇ에 살게 되면서 성공하는 삶보다 행복한 삶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미실란의 이동현 대표도 나와 같은 순서로 시골에서 대도시로 다시 소도시 곡성에 왔다. 자라온 시대가 달라 나와 비교하기 어렵지만 학창 시절에 느꼈던 감정은 공유가 될 것 같다. 미실란의 이 대표는 김탁환 작가에게 자연을 보고“아름답지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경남 진해 출신인 김 작가는 서울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이 대표의 말에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눈치였다. 하지만 미실란에 자주 왕래하며 이 대표와 모내기부터 파종까지 함께 했다. 이 대표와 마찬가지로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체험함으로써 이 대표의 “아름답지요?”라는 말을 통감 할 수 있었다.

침실습지의 뽕뽕다리

한 명의 동행자를 데리고 ㅇㅇ에서 ㅇㅇ을 거쳐 섬진강을 따라 곡성에 올라갔다. 해외여행을 여러 번 가 봤어도 이런 벅찬 기분은 처음이었다. 늦은 가을장마가 연일이라 날씨 걱정이 되었지만 감사하게도 곡성은 우리를 화창한 날씨로 반겨주었다. 김탁환 작가의 표현대로 곡성은 여러 산맥이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원안에 들어온 기분은 엄마 품에 안긴 듯한 따뜻함이었다. 그리고 곡성의 섬진강은 하동의 섬진강과 달랐으며 곡성의 침실 습지에선 순천의 습지와 다르게 뒤에 산맥이 든든하게 지켜주어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곡성의 자연을 경험한 김탁환 작가처럼 나 또한 이동현 대표의 “아름답지요?”에 공감할 수 있었다. 미실란은 폐교를 활용했다. 학교 정문이 내가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와 흡사하여 마치 복사 붙여넣기를 한 듯했다. 얼마나 비슷하던지 교정에 심어진 커다란 플라타너스를 시작으로 운동장에 있는 동상들 그리고 복도에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곳에 있는 만큼은 초등학생 1학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농부임에도 내가 먹고 있는 쌀에 대해 너무 몰랐다. 자연과 상생하며 지낸 할아버지는 쌀 한 톨 한 톨을 소중하게 여기셨다. 그런 할아버지는 내게 쌀 한 톨도 남기지 말고 싹싹 긁어먹으라 하시며 밥상머리 교육을 하셨다. 그렇지만 반복되는 할아버지의 말씀은 단지 내게는 한낱 잔소리일 뿐이었다. 도시에서 자연을 밀어내고 삶을 영위한 나는 자연이 가져다준 소산에 대해 무심했다. 아마 그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삶이 편리할지는 몰라도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미실란의 밥cafe반(飯)하다에서 이동현 대표의 철학과 자연이 내어준 선물을 맛볼 수 있었다. 278종의 벼를 손 모내기로 직접 심은 이 대표의 노고와 그의 응답으로 곡성에 제격인 ‘삼광’이라는 품종을 자연은 내주었다. 단순히 우리는 식당에서 밥을 먹은 것이 아니다. 이 대표와 곡성이 함께 지낸 나날들을 한 끼 식사로 간접경험 한 것이다. 그 체험으로 자연스레 시골에서 자랐던 나의 어린 시절이 상기되었다. 그렇게 김탁환 작가의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와 이동현 대표의 미실란은 도시 속에서 11년 넘게 잠들어 있던 내 마음을 발아시켜주었다. 그 이후 책과 밥으로 발아된 마음은 ㅇㅇ에 이앙하기 적합했다.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ㅇㅇ에 옮겨 살면서 이미 햇빛 가득한 땅은 준비되어있었다. 이로써 곡성에서 발아해 ㅇㅇ에서 모내기한 셈이다. 앞으로 김매기와 추수, 파종이 남았지만 미실란의 철학과 함께라면 끝까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생겼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행복한 삶, 우리가 누려야 할 삶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다. 이를 잊지 않고 파종까지 간다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 같이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자. 자연과 함께 미실란과 함께 라면 행복의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통해 발아하기까지 도와준 김탁환 작가와 이동현 대표, 옥토를 내어준 ㅇㅇ시 그리고 함께 곡성까지 동행해준 ㅇㅇㅇ선생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