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읽고


1. 읽기 전 제목에 대한 감상

운명의 영단어로는 대표적으로 Fate와 Destiny가 있다. 이 둘의 차이는 Fate는 숙명 즉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에 가깝고, Destiny는 인과적 운명으로서 행동에 의해 결정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국문으로 운명은 한 단어이지만 뉘앙스로 구분해놓은 영단어로 볼 때 제목으로 붙여진 운명이라는 것이 Fate 일지 Destiny일지 궁금했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헝가리인이다. 당연히 그가 쓰는 언어는 헝가리어일 것이고 원작도 헝가리어로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형적으로 봐도 헝가리어는 라틴어계가 아니라 우랄산맥에서 비롯된 우랄어족계열 언어이다. 먼저 라틴어계 영어 제목은 <Fateless>이다. 국문 제목은 운명인데 운명 없음이 원제목이라니? 헝가리어로된 제목은 <소르슈탈란사그(Sorstalansag)>이다. 번역하면 똑같이 운명 없음이라 한다. 그렇게 되면 제목이 라틴어 Fatum에서 오는 Fate인지 Destiny인지 상관없지 않은가? 어차피 운명이 없다는데. 그리고 왜 국문 제목은 운명이라 했을까? 이 책을 누가 처음 한국으로 가져왔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왜 원제목 말고 제멋대로 운명이라 제목을 수정했는지. 그렇지만 책을 다 읽으면 그 이유가 납득이 될까? 싶기도 하다. 근데 운명 없다는 게 무슨 말일까? 어떤 운명일까 생각하는 것보다 운명이 없다는 말이 더 이해하기 힘들다. 어느 책 보다도 복잡 미묘한 제목이다.

2. 독후감

14살짜리 아이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 보다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특별한 경험 덕분이었다. 약 7년 전 이 맘쯤 부다페스트를 다녀왔다. 헝가리수용소위원회에서 자유의 몸이라 선포한 뒤 먹었던 구야시 혹은 굴라쉬라는 음식도 먹어 보았다. 주석대로 그 음식은 육개장과 거진 비슷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남자라면 보통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입대를 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 의무가 남자들이 처음으로 겪게 되는 자유에 대한 억압과 제약의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11월에 입대한 나는 그 해를 넘기면서 성년이 되었기 때문에 그날들을 기념할만한 성인식이라 기억하고 있다. 14살짜리 아이의 이야기 속에는 이동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 재밌을 정도로 많이 이동하고 이동되었다. 기차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는데 현재 내 방에서 들려오는 토페도카와 철도 선로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 상황을 현장감 있게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문집을 만들고 나서 인지 책을 보는 시점이 풍부해졌다. 표지, 책날개 그리고 띠지 그전까지는 살펴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눈길이 간다. 하지만 이것들에는 생각보다 중요한 사실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앞표지에는 여러 개 중 하나의 창이 열려있는 그림이 있었고 그 뒤에는 요약된 해설이 있었다. 그리고 책날개에는 보통 그렇듯이 작가와 옮긴이의 약력이 있었다. 하지만 띠지가 이 책 내용에 핵심을 담았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어쩌면 스포일러 당한 거 아닐까 하며 보자마자 기분이 나빴다. 띠지에 담고 있는 문장 중 <홀로코스트>와 <일상>이라는 이 두 단어가 내용에 핵심이라 생각했다. 띠지만 없었다면 이 <운명>이라는 책의 소재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었고 그 내용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지 모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친절할 수 있는 이 띠지가 나는 불쾌했고 저번 주에 <만들어진 승리자들>을 읽어서 그런지 띠지에 있는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낙인이 책 내용과 세상에서 이 책이 조명된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되었다.

14살짜리 아이는 1년 동안 많은 곳을 누볐다. 그의 고향 부다페스트에서 시작해서 셸 정유공장에서 세관 건물 그리고 열차를 통해서 벽돌공장에 갔으며 그리고 아우슈비츠로 갔다. 그곳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부헨발트로 이동했고 차이츠로 갔다. 그리고 다시 부헨발트로 가고 어떤 시설로 옮겨졌으며 다시 멋진 녹색 막사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는 자유를 얻게 되었고 미군들의 도움으로 동쪽으로 갈 수 있었으며 어느 도시를 통해 헝가리로 가고 서부역에 걸쳐 동부역으로 이동해서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이런 일련의 여정들을 278페이지 분량 안에 넣었다는 것이 그 여정들 속에서 작가가 강조하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띠지에서 스포일러 당했지만 민족주의의 오류로 인한 인종차별과 학살의 비애는 다른 책과 영화에 비해 많이 축소되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어서 아무리 축소했다고 했어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아우슈비츠의 사흘만 가지고도 300페이지는 족히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이가 경찰의 명령에 의해 버스에 내리고 그의 인솔로 영문 없이 시작된 강제 수용 이야기는 그 아이의 일상을 통해서 집중할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대한민국 남자는 이 아이의 일상이 공감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 누가 군 복무를 감사히 여기고 훈련소 생활을 기쁘게 여길까? 역사적으로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과거가 있고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이 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남자로 좁게 표본을 뽑아보더라도 이 이야기를 멀찌감치 바라보듯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될 때 그 아이가 받았던 행동제약이 공감이 갔다. 6주 동안의 훈련소 기간 덕분에 그 아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규율에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이유 없이 화내고 재촉하는 조교 무리들은 우리를 쉽게 통제했다. 그들의 허락 없이는 행동할 수 없었고 훈련을 위해 지급되는 재활용 전투복은 내 몸에 딱 맞을 거라는 기대는 사치였다. 신형 전투복을 지급받기 위해 새로 도입된 장비로 내 몸을 스캔했지만 측정된 데이터는 내 몸에 딱 맞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때 불평불만하지 않았다. 하지 못 했다는 게 더 정확할까? 14살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불만으로 충만하여 성격이 괴팍해진 것은 차이츠로 이동하고 몸이 불편하기 시작할 때부터 였다. 다른 표현으로는 인간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처를 치료받는 과정에서 그는 평안을 얻었다. 나의 군대생활이 그렇듯 그 아이도 1년 동안의 강제수용기간 내내 불행하지는 않았다.

강제 수용되기 전 후로 아이의 인식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자매와 언너마리어와의 대화와 두 노인과 대화를 비교하며 보면 알 수 있다. 자매 중 언니가 발제한 주제는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와 다름에 대한 각자의 인식에 대해서였다. 언니는 '그 다름은 우리 안에 있어'라며 이야기하고 언너마리어는 그것이 종교라며 그 언니와 한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이는 왕자와 거지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면서 겉모습이 우리를 다르게 본다고 이야기했다. 즉 그 속에는 우리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다르게 보는 것들 때문에 시선들이 변한 것이라 이야기 했다. 나는 이것이 마치 하나님 앞에 모두 평등하다라는 것을 유념해두고 이야기 한 걸까?하며 그의 생각을 높이 샀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서 노인들과 대화에서는 사뭇 달라진 그의 모습이 보인다. 기차에서 만난 기자와 노인들과 달리 피해자의 복수심은 그 아이에게 없었다. 다만 그것을 받아 들인 것 같았다. 결국 받아 들인 아이가 더 평안해 보였다. 노인들과의 언쟁에서 아이는 강제수용이 운명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만약 일제강점기가 우리 민족의 운명이다 혹은 43 사건이나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이 누군가가 우리 민족의 운명이라고 하면 분명 몰매를 맞을 것이 분명하다. 그 아이가 장소한 자리의 분위기가 그랬을 것 같다.

자매 중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 다르다는 인식이 자부심을 가지게 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다고 했다. 창피하다는 것은 세계 2차 대전 상황에서 보면 이해 가능했지만 자부심은 뭘까? 나는 그것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부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유대인들의 인식은 <베니스의 상인>에서 고리대금 업자였던 샤일록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14살짜리 아이가 1년 동안 강제수용소 생활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에 대한 죄성을 깨달은 듯했다. 유대인이라 당했다가 아니라 유대인이라 당하는 거라 생각한 아이는 그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 아이가 고난과 환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모세와 닮았다 생각했다.

신앙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서, 그 아이는 피해자 프레임 안에서 벗어나자라는 용기 담긴 이야기도 했다. 작가는 아이를 통해 '우리 과장하지 말자'라고 했고 누군가가 수용소 생활을 물어보다면 그곳에서의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어야 할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지 않은가 그리고 미시적으로, 개인으로 바라봐도 항상 슬픔에 가득 차 있으면 삶의 동력이 생길 수 없다. 아픈 역사 속에서 행복 또한 존재했고 그 행복을 재조명하면 그 역사를 좀 더 통찰력 있게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했다. 그리고 심리학에는 죽음의 5단계라는 것이 있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이렇게 5가지이다. DABDA라고 줄여 이야기하기도 한다. 죽음의 5단계라 하지만 안 좋은 일을 받아들이는 5단계라 바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에 4단계를 거처야 수용에 단계에 이를수 있고 수용의 단계를 넘어야 그 안좋은 일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생각한다. 언제까지나 안좋은 일에 매여 있을 수는 없다.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그 역사에 매여 있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신앙적으로는 그 아이의 회개와 아픔에 매여있는 것과 그리고 벗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