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명: 베트남전 인권침해 진실규명을 위한 국회 토론회
일시: 2025년 6월 19일
장소: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제1소회의실
핵심 키워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 특별법, 한베평화재단, 응우옌 티 탄, 국가폭력, 기억과 책임
2025년 6월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베트남전 인권침해 진실규명을 위한 국회 토론회에 참석했다. 퐁니·퐁넛 학살과 하미 학살의 생존자 응우옌 티 탄 두 분의 증언, 그리고 법·시민사회·참전군인의 목소리를 한 자리에서 듣는 시간이었다. 이 글은 ‘왜 나는 국회의사당까지 왔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현장에서 들은 말과 침묵을 가능한 한 또렷하게 기록하려는 시도다.
들어가기 전에
프롤로그 – 나는 왜 국회의사당에 왔는가

독서와 글쓰기를 계속해오면서 자연스럽게 ‘한베평화재단’이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책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배경자료를 찾다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이런 단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반가웠다. 동시에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컸다.
그 후로 재단의 정기 후원자가 되었고, 5월부터 매달 간행물과 공지사항을 이메일로 받아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지나치던 메일함에서 발신자 ‘한베평화재단’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메일 내용의 맥락은 이러했다. “응우옌 티 탄이 한국에 옵니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녀는 퐁니·퐁넛 학살의 생존자였다. 이번 국회 토론회에는 하미학살 생존자인 또 다른 동명이인의 응우옌 티 탄도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마을에서, 그러나 같은 전쟁과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 이 두 생존자가 한국 땅을 밟고, 우리의 국회의사당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사실 나는 한베평화재단에서 매년 여름과 겨울에 진행하는 평화기행에 관심이 많았다. 올해 7월에도 함께 떠나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가지 않기로 했다. 현실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여건이 발목을 잡았다.
그런 아쉬움이 남은 상태에서 토론회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진심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KTX 왕복 비용만 거의 10만 원, 평일 하루 연차도 부담이었다. 매일 갈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다행히 토론회 당일 목요일 회사 작업량이 줄어들면서 기습적으로 연차를 내고 여의도로 향했다.
베트남전에 대한 관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으며 ‘왜 사람은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가’라는 질문이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았다. 나는 그 질문의 해답을 ‘사랑’에서 찾고 싶었고, 그 마음이 나를 독서로, 사유로, 때로는 여행으로 이끌었다. 폴란드와 독일의 기억 현장을 다녀온 것도 같은 연장선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군이 가해자였던 베트남전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국회의사당까지 오게 되었다. 이번 토론회는 단순한 정보 수집의 자리가 아니다. 전쟁과 기억의 ‘증인’을 직접 마주하는 자리이고, 그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말’을 하러 왔는지를 듣는 시간이다.
나는 이 현장의 공기와 울림, 증언과 침묵마저도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2. 관심의 시작 – 나의 베트남전 입문기
베트남전에서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정확한 계기를 떠올리긴 어렵지만, 어린 시절 다녔던 독서논술 선생님과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두 분 모두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있었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참혹한 장면들을 종종 이야기하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베트남전에는 무언가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마치 제주 4·3이나 광주 5·18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존재하는 아픈 기억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해자의 역사’라는 사실로 다가온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계기는 의외였다. 여자친구가 캄보디아로 파견근무를 가게 되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캄보디아의 역사, 특히 크메르루주 대학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어서 발칸반도, 보스니아 등 세계 곳곳의 대학살에 대해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러던 중 ‘한국’이라는 이름도 그 안에 있다는 걸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인터넷에서 뉴진스 팜하니의 부모님이 보트피플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접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와 관련해 베트남 내에서 한국에 대한 반감과 불매운동이 있다는 소식, 그리고 “대한민국은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는 베트남 커뮤니티의 목소리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정의를 외치지만, 정작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망각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 모순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때부터 질문이 생겼다.
“왜 우리는 사과받길 원하면서, 사과하려 들지 않는가?”
이 질문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책임의 문제로 다가왔다.
이 질문은, 나에게 단순한 도덕의 문제를 넘어서 기억과 책임의 문제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해자의 역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3. 질문에서 행동으로 – 내가 ‘찾아보기’ 시작한 여정


베트남전쟁에 관심이 있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누군가에게 설명하라면 말문이 막힐 때가 많았다. 학살이 어느 지역에서 일어났는지, 전쟁은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 이어졌는지, 인도차이나반도의 전운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관련 다큐멘터리나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관심이 가짜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지식보다는 의식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민간인 학살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옳지 않다’는, 최소한의 윤리적 직감과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지식은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 관심과 인식, 감수성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물론, 지식 없는 문제의식이 성찰로 이어지려면 반드시 학습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도 받아들인다.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꺼낸 건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였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베트남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한베평화재단에서 말했듯, 베트남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맥이 닿아 있다는 설명에 깊이 공감했다. 책 속에서도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장교가 등장했고, 그 연관성은 결코 억지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베트남은 내게 조금 더 개인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여자친구를 만나러 프놈펜에 갈 때마다, 호치민의 탄손누트공항을 경유하게 된다. 올해 4월 30일에도 그랬다. 공항 대기 공간에서 전쟁을 주제로 한 베트남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있었고, 아이들이 볼 법한 형식인데도 주제가 꽤나 무거워서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이 베트남의 통일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은 이제 나에게 단지 학살 피해자의 나라가 아니라, 늘 경유하고 머무르는 공간이자, 가깝고도 미안한 나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처음에는 혼자만의 관심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한베평화재단이라는 단체를 통해 그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 문제를 끈질기게 기억하고 증언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나를 위로했고, 동시에 나도 그 연결망의 한 사람으로 행동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했다.
일본 정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가, 정작 우리가 저지른 일에는 침묵하는 현실. 나는 그 침묵을 넘어서고 싶었다. 사과를 요구하려면, 우리도 사과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4. 현장에 다녀와서 – 국회의사당의 진실의 목소리



2025년 6월 19일, 나는 베트남전 인권침해 진실규명을 위한 국회 토론회에 참석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 모바일 신분증만으로도 출입이 가능했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다만, 신분증을 제출하지 않아서 별도의 출입증은 지급되지 않았고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회의장은 절반 정도의 좌석이 채워져 있었다. 분위기는 조용하고 집중되어 있었고, 서로 얼굴이 익은 듯한 참석자들이 많아 보였다. 평화기행 문의 메일을 주고받았던 한베평화재단의 이정란 활동가님은 나를 기억해주셨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내 가방 속 회사 명함이 있어서 나도 명함을 전달해줄 수 있었다.
오후 2시 5분, 토론회가 시작되었다. 민형배 의원은 “우리 군이 저지른 학살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며 베트남전 진실규명 특별법 제정을 다시 한 번 촉구했다. “잘못을 직시하고 바로잡을 용기”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진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던지는 요청이었다.

무게 중심은 결국 두 명의 생존자, 퐁니·퐁넛 학살의 응우옌 티 탄, 하미 학살의 응우옌 티 탄 여사에게로 향했다.
탄 여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명확하고 단단하게 증언했다. 방공호에 숨어 있던 가족들을 한국군이 불러냈고, 어린 남동생과 함께 총에 맞았던 기억.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그녀의 고백. “그때 조금만 더 힘을 냈다면 동생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말에선 세월을 통째로 짊어진 후회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미 마을의 탄 여사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지만, 흘릴 눈물도 마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눈물이 마른다고 해서, 아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녀는 분명히 짚었다. 왜 한국군은 군인과 싸우지 않고 민간인을 학살했는지, 왜 사과는 여전히 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미국은 사죄하고 용서받으려 했지만 한국은 그조차 하지 못했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물었다. “이건 한국과 베트남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지켜보는 인류의 문제”라는 탄 여사의 말은 토론장을 가득 채운 침묵보다 더 무거웠다.
이후 발제자들은 법적 쟁점과 시민사회의 노력, 그리고 참전군인들의 고통까지 이야기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국가배상 소송이 세계사적으로도 진일보한 일”이라고 강조했고, 석미화 활동가는 “가해자를 마주하려는 시도 자체가 진실을 향한 길”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참전군인 오경열 씨의 증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군 지휘관이 실적을 위해 적군의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들고 다니게 했다는 말은, 전쟁이 만들어낸 비인간화의 실상을 드러냈다. 오 씨는 “그 포로도 생명인데, 뜨거운 철장 개집에 가두는 것을 보고 괴로웠다”고 말하며 트라우마와 자책 속에 살아온 50년을 털어놓았다.
토론회 말미, 김남주 변호사는 왜 이 법이 반드시 통과되어야 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우리가 이 법을 제정한다면, 세계 최초가 될 것입니다. 전쟁범죄를 스스로 밝히고 사죄한 나라로.” 마지막 발언을 맡은 강민정 전 의원은 “이건 두 명의 생존자를 위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나라가 될 것인지, 어떤 기억을 남길 것인지의 문제”라고 정리했다.
이날 토론회는 단순한 논의의 장이 아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기억을 요청하는 목소리’들이 모인 공간이었다. 나는 듣는 내내 불편했고, 또 벅찼다. 이것은 가해자였던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그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5. 돌아오는 길 – 질문과 확신 사이에서
토론회를 지켜보며 가장 깊이 남았던 순간은 퐁니 마을의 응우옌 티 탄 여사가 여덟 살 때 복부에 총상을 입은 날을 또렷하게 증언하던 장면이었다. 가족과 함께 방공호에 숨어 있었지만, 한국군의 위협에 못 이겨 밖으로 나왔고, 그 순간 총알을 맞았다는 그녀의 말에는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참전군인이었던 오경열 선생님의 고백도 잊을 수 없다. 전장에서 명령에 의해 적의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야 했던 기억, 포로를 뜨거운 개집에 가두고 물을 주지 못하게 했던 순간, 전쟁 속에서 개인의 인권이 어떻게 짓밟히는지를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증언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공간에 모여 각자의 고통을 증언하던 이 장면은, 국가폭력의 무게와 그 안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윤리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특히 김남주 변호사가 던졌던 질문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수많은 의제들 중 왜 지금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가?” 그 물음은 우리 사회가 지금 어떤 도덕성과 기억의 감각을 갖고 있는지를 되묻게 만들었다.
동시에 또 하나의 질문이 따라왔다. 과연 이 나라 사람들은 베트남전쟁, 그리고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응우옌 티 탄 여사가 2015년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때, 그 방문을 반대했던 단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여전히 냉전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은 토론회장의 사람들로 그 무지와 무관심을 넘어서기에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회의감도 스쳤다.
하지만 곧, 이런 마음이 따라붙었다. 베트남전쟁을 바로 보자는 목소리가 한국 사회에서 처음 나오기 시작한 지는 수십 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는 말했고, 기록했고, 싸웠다. 오늘의 나는, 그 어제의 노력들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 사실이 마음을 조금은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생각이 완전히 새로워진 건 아니지만, 달라진 것은 분명히 있었다. 내가 가진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고, 피해생존자와 참전군인의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다시 한 번 이 여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었다. 작은 도시의 작은 나의 방에서 시작된 나의 사유는 국회의사당까지 도달했고, 마침내 연결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모든 여정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
6. 에필로그 – 사랑으로 만연한 사회를 위해

베트남전쟁의 민간인 학살 피해생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인들에게도 연민과 관심을 보내는 일. 이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오늘 토론회를 통해 전쟁을 단순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느꼈다. 전쟁은 다층적인 폭력이고,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 입은 이들이 있다. 그 모든 고통 앞에서 우리는 먼저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도 나는 이 작은 소도시에서 독서모임을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와 관련된 책이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된다면, 오늘의 기억과 지금 정리한 생각들을 꺼내어 나누리라 마음먹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이어가기 위해.
혹시 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전쟁이든 정치든, 양쪽 모두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베트남전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응우옌 티 탄 여사를 사랑하고 동시에 오경열 참전군인 선생님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사랑으로 만연한 사회가 되기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되묻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여유를 앗아가고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가로막는 그 어떤 세력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말하고 싶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요청될 뿐이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국회 토론회, 한베평화재단, 진실규명 특별법.
이 네 단어가 오늘 내 발걸음을 국회의사당으로 데려왔다.
'소소한 일상 > 일기&생활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결혼 축의금 정산과, 그 이후의 생각들 (2) | 2026.03.29 |
|---|---|
| 태국 홍수, 해외 기부 쉽게 하기: 토스 GLN으로 2,000฿ 보내본 후기 (0) | 2025.12.25 |
| 푸꾸옥 수용소, 나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나 (2) | 2025.03.01 |
| 캄보디아 노래 입문기 (Khemarak Sereymun - ប្រាថ្នាជួបស្រីក្នុងថ្ងៃចូលឆ្នាំ 외 1곡) (0) | 2025.02.28 |
| 세계 2차대전 나치 수용소 탐방기 –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그리고 4곳의 역사적 장소 (2) | 2025.01.15 |
| [기행문] 6·25전쟁 속 노근리양민학살사건 피난길 따라가기 (5) | 2024.07.21 |
| 싱가포르 여행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느낀점 🇸🇬 (4) | 2024.04.20 |
| 호치민에서 프놈펜 버스로 육로 국경(목바이·바벳)넘기 (24.04.11 기준) (4) | 2024.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