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획의도
초등학생 때 읽었던 <노근리, 그 해 여름>을 올해 4월에 읽게 되었다. 영동군청에 그 피난길에 대한 지도가 설명이 되어 있어 나도 그 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주43사건을 기리기 위해 제주를 찾고 다랑쉬굴을 찾아간 것처럼 뜻깊은 일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표현은 옳지 못하다라고 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간단하게 전쟁을 일으킨 주범과 남침의 의미를 퇴색하게 된다고 그런다. 그런 이유로 625전쟁이라 칭하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2. 피난길 따라가기
피난의 시작인 주곡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했다. 그래서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시내버스 혹은 택시를 타고 주곡리마을회관까지 갈 생각을 했다.
시내버스 정보가 정확하지 않아서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었는데 생각보다 택시가 바로 잡혀서 다행이었다. 택시를 주곡리마을회관까지 찍고 피난길 행군을 시작하기로 한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인민군 때문에 계속 남쪽으로 피난 가는 상황이다. 주곡리 주변에 있는 주민들은 미군들의 통솔하에 안전하게 남쪽으로 피난 가게 된다. 사실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굳이 데려다가 피난을 가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군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적군이 계속 내려오고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지키려면 같이 데리고 가야 되지 않겠나. 마치 불난 집에서 최대한 많은 희생자를 구해내려는 소방관의 심정일까?
아무튼 주곡리에서 골짜기 따라 들어가면 임계리가 나온다. 임계리에서 잠시 주둔해 있다가 다시 주곡리까지 나오는 루트다.
주곡리 마을회관에서부터 임계리 마을회관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약 40분 정도 된다고 네이버지도에 설명하고 있다. 예상시간 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그런지 30분에 주파한 것 같다. 70년 전에는 아스팔트도로는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신작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천변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그냥 흙길로 피난 행렬을 했을 것인데 아이들과 노인들이 이 길을 영문 없이 걸었다고 생각하니 쉽지 않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여느 때 운동하는 것처럼 에어팟을 끼지 않았다. 피난길 체험에 충실하자는 의미였다. 마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임계리로 나가고 들어가는 차들은 꽤나 많았다. 비도 오지 않는 날 우비는 완전 객기였지만 차를 피하기에 충분한 보호색이 돼주었다.
논이었던 이 고장의 이미지는 포도밭으로 탈 바꿈 되어있었다. 영동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포도이지만 70년 전에도 포도를 재배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농작물이 벼에서 포도로 바뀐 것처럼 임계리와 주곡리의 이미지에서는 피난민들의 족적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제주43과 마찬가지로 80~90년대의 학생운동 때에 비로소 밝혀진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이었다. 그동안 정부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픈 기억을 묻어두고 그저 생업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포도가 가득한 것은 아니겠지만 풍성한 포도를 보면서 몇십 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포도의 고장이라는 이미지가 그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주곡교를 통해 주곡천을 건너면 이제 시작이다. 대전에서 대구로 가려는 목적으로 철길 따라 황간으로 가야 된다. 철도는 지금까지도 유효한 철도였다. 화물기차와 ITX-새마을기차가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왕복일차선도로와 철도의 간격은 지형에 따라 좁아졌다 멀어졌다한다. 피난민들은 철길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전쟁통이니 당연히 기차는 운행하지 않으니 걸어도 괜찮을 것 같다.
피난민들은 철도 아래 자갈밭을 걸었을 것이고 나는 그저 아스팔트를 걷고 있다. 그리고 장마기간이라 감사하게 구름이 해를 가려줬다. 그때는 어땠을까 해가 작렬한 날씨였을까? 자갈밭의 지열은 얼마나 더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가끔 들리는 경비행기 소리와 기차 지나가는 소리는 전투기가 여기를 지나갔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는데 충분한 음향효과로 작용했다.
노근리까지의 길은 멀었다. 12km 정도 되는 걸음을 언제 해보았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10km 마라톤을 뛴 걸 생각하면 그렇게 긴 거리는 아닌 것 같으면서 주곡리에서부터 노근리까지의 거리는 상당했다. 오르막도 있었고 차들을 피해서 신경 쓰며 갓길에서 걷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그때 피난행렬에 속해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과거 이 나이는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는 한 명의 가장일 테다. 온 가족을 이끌고 피난길에 나는 어떤 심정일까? 칭얼대는 아이들, 노쇠한 어머니를 보며 어떤 생각으로 이 자갈밭을 걷고 있었을까?
"노근리까지 가는 도중 폭격을 맞았고 그리고 다시 노근리까지 행군한다. 거기서 살아남은 나는 노근리까지 끝까지 걸어가고 있다. 누가 죽고 누가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식솔들을 챙겨 노근리까지 가야 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연신 이어지는 오르막길에 자주 쓰지 않는 근육들이 쑤시기 시작했다. 얼굴은 시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심박수는 180까지도 오른다. 내 애플워치는 주인이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실은 기쁘다 애플워치로 이 족적을 기록해 내고 있으니까.
온몸이 쑤시고 발은 아프고 심박수는 180 이상인 상태에 날씨는 한여름 무더위. 옆에 여전히 아이들은 쉬고 싶다고 목마르다고 나에게 외친다.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을 아이들에게 설명해 줄 수 없다. 나도 이 피난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총을 들고 있는 자들이 무서울 뿐이다. "
폭격을 피해 그들은 다리 밑으로 피신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주경계를 했다.
쌍굴다리 현장 앞에 서보면 압도감을 느낀다. 마치 거인을 본 듯한. 그리고 생각보다 굴이 작았다. 20걸음 정도 되는 폭이었다. 그리고 쌍굴 중 하나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었다. 과거에도 이곳이 길이였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사방에 마킹되어 있는 총흔은 어림잡아 50개는 되어 보였다. 총알이 비산 되어 천장에도 흔적이 있다. 비산 된 흔적을 보니 어떤 식으로든 그 참혹한 현장을 느낄 수 있었다.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와 좁은 굴 그리고 동그라미와 세모로 마킹되어 있는 현장은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나에게 접근하는 느낌이 들었다. 을씨년스러웠다.
3. 느낀 점
쌍굴다리를 거쳐서 주차장에 돌아와서 카페에서 잠시 쉬러 들어왔다. 카페 주인과 한두 마디 나누었다. 책을 읽고 임계리부터 걸어왔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그 진상에 대해서 성의 없이 간단하게 자극적이게 설명했다. 그랬더니 카페주인은 책과 사실은 다르다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책에서는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하며 폭격을 피해 피신하라고 터널에 피난민들을 대피시켰고 그 속에 소위 이른바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로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 카페주인의 말을 정확히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느낌 감정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이 지역사람들이 느끼는 노근리 사건은 그저 책으로만 보는 나와 다를 수 있겠다. 또 하나는 미군을 싫어하게 될 만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미군을 옹호하고 입장이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얕은 지식으로 찾아온 나 같은 사람들에게 불쾌한 감정으로 배척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나름 그 지역 주민에게 이 피난길체험을 했다고 하면 칭찬받을 줄만 알았다. 어쩜 그런 생각을 하느냐 말이다. 하지만 그 카페주인은 달랐다. 뜨뜻미지근했으며 임계리라는 지명도 몰랐다. 그분이 어디 출신이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분이 내게 준 뉘앙스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느냐 물어보신다면 나는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꽤나 논란이 되고 자극적인 입장이겠지만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이게 맞다.
미군은 피난길에 인민군들에게 속아서 많은 전우들을 잃었다. 주곡리에서 노근리까지 이어지는 피난민들 또한 과거에 인민군에게 당했던 것 과 달리 인민군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귀납적 추론을 통해서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십 몇백 명의 말도 안 통하는 타국사람들을 이끌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그들 또한 무서웠을 거라 생각한다. 쪽수로 한참 모자라는 미군들 역시 한 나라의 청년이었고 미숙한 성인이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보다 어떻게 그 상황을 닥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군을 이렇게 생각하면 인민군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인민군도 한 명의 가장이고 청년이었을 것이다. 전쟁은 그들을 짧은 시간에 괴물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전쟁 속에 괴물이 된 것은 국군이나 미군이나 인민군 모두 마찬가지였다. 피난민 곁에 미군이 있어서 다행이었고 인민군이 있어서 다행이었고 국군이 있어서 다행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전쟁은 누가 옳고 그름 없는 참혹한 일이다. 그저 잘못을 묻는 다면 소수의 지도자층이지 전선에 있는 군인들과 민간인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아픔이 있는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도 정치적인 갈등이 첨예하다. 직장 내에서 정치적 이야기를 논 할 때마다 속으로 불쾌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서 윤석열대통령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이재명 대표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트럼프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바이든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등등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만약 본인들의 가족이 미군들에 의해 피해를 봤다면 반미감정은 당연한 것이고 어떤 후보의 정치적 행보에 미국 친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분노할 수 있다.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만들 수 있다. 그 변수들을 이해하면 누군가가 정치색을 드러내고 표출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보다 측은한 마음을 들게 해 줄 수 있는 유익이 있다.
내게 있어서 이번 피난길 체험은 정치색이 가지각색인 주변인들을 쉽게 낙인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지니지 않게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미워하는 감정은 나에게도 좋지 않게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미워함 보다 이해함이 내게도 더 좋은 작용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얽히고 얽혀 풀 수도 없이 꼬여버린 이런 갈등을 두고 포용을 하고 싶은 나의 바람이었다. 제주도 그렇고 노근리도 그렇고 캄보디아도 그렇고 베트남도 그렇고 앞으로 가볼 아우슈비츠도 그러할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불편하거나 지적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비밀덧글이라도 남겨주시면 너무 기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이 참사를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이 많이 부족하겠지만 너그럽게 살펴주신다면 거듭 감사합니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바라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연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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