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주는 주로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곡을 찾는다. 조지 윈스턴의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December>와 <Autumn> 앨범의 수록곡 모두 그녀의 말처럼 심장을 두들기는 강렬한 피아노 연주였다. 그 ‘강렬함’이라는 표현은 건반악기라는 타협을 넘어, 피아노가 타악기처럼 공간을 울리게 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조지 윈스턴의 음악은 강민주의 차 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언제 음악을 듣는가. 슬플 때, 화날 때, 그리울 때. 모든 감정은 음악을 듣는 이유가 된다. 조지 윈스턴의 음악을 찾는 민주는 어떤 감정을 품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까. 나는 그 궤적을 함께 따라가 보기로 했다.
강민주의 폭력성 안에서 연약함이 느껴졌다.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는 자, 더 정확히는 여권 신장에 대해 주제의식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 어머니와 같이 살아가면서 강민주의 시선은 어쩌면 편향적으로 고정되어버린 것 아닐까. 여성 문제 상담소에서 내담자들이 토로하는 여성들의 핍박이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껏 여성들이 홀대받아왔다는 것에 공감한다. 하지만 강민주는 공감하고 개탄스러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성 인권을 위해 세상에 한 획을 긋길 원했다. 그녀는 잔다르크처럼, 세상이 억압할지라도 본인의 방식대로 세상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다만 그 방법이 과격했을 뿐이다.
강민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모순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압제하는 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서 ‘거울효과’라고 하는 개념을 그녀는 몸소 실천하고 있다. 과격한 메시지 전달은 자칫 잘못하면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에게 관심이 쏠릴 수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강민주가 세상에 내던진 메시지는 핍박받은 여성들의 이야기들을 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상담소에서 많은 내담자들을 만나면서, 가정에서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강민주의 범행 동기가 내포된 편지글 안에서 그 의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중들은 그녀의 편지에 공감했고, 격동했다. 하지만 반대로 백승하는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강민주의 극단성을 중화시켜 주었다. 강민주가 남성에 대한 편향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을 이해하려면, 그녀의 삶을 관통해서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과 대중들은 그만큼 인내심이 깊지 않다.
백승하가 강민주의 속박에서 몇 개월 만에 풀려났어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속단하지 않은 이유였다. 강민주의 메시지를 훼손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강민주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채, 상담소 아줌마들을 통해서 김인수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줄곧 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무시하지만, 김인수는 끈질긴 인물이다. 마치 스토킹 범죄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김인수는 강민주를 여러 방면에서 귀찮게 했다. 구애 방법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경찰에 그녀의 의혹을 까발리는 역할로 한몫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김인수의 등장은 독자인 나에게도 짜증이었다. 집요하지 못했고, 단지 집착이었다.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사이인데도 말이다. 이 시대 한 남자의 사랑 표현법, 그리고 아줌마들의 오지랖은 강민주를 방해하는 요소들이었다.
백승하는 유년 시절 동두천에 살면서 이웃으로 지켜본 양공주, 노랑이 아줌마를 민주를 통해 떠올리게 되었다. 가족을 두고 떠난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노랑이 아줌마와 강민주와 같은 선상에서 그려내는 듯하다. 그러면서 백승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불구라고 하며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납치된 그는 마치 스톡홀름 증후군의 증상처럼 강민주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듯하다.
납치를 당한 백승하와 범죄를 저지른 강민주는, 각자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기반으로 해서 친밀감을 쌓게 된다. 강민주가 언론사에게 보낸 편지들의 내용을 보고 백승하는 연민을 가지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강민주는 그에게 우호감을 띤다. 결코 백승하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강민주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종국에는 이 둘은 외젠 이오네스코의 <수업>이라는 연극을 공연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들은 야릇한 관계를 쌓아 갔다.
아직도 황남기가 강민주를 ‘사모님’,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며 따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강민주를 죽여버린 장본인이 황남기였다. 그는 왜 강민주를 죽였을까. “그녀를 위해서”라는 말로 마무리를 짓는다. 황남기의 눈에는 점점 강민주의 모습이 소실되어가는 듯해 보였던 것일까? 백승하와 연극을 준비하고, 백승하를 위해 아들을 납치하고… 이런 것들은 처음에 계획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황남기는 메시지를 지키지 못한 메신저를 대신해서 메시지를 수호한 것일까?
강민주의 과격성을 지켜보면 출퇴근 시간을 막으며 본인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가 떠올랐다. 백승하가 강민주의 입장을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전장연이 전적으로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우리는 언제든지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인권, 기후 위기, 세대 갈등 등 많은 메시지들이 우리 사회에 던져질 수 있다. 우리는 강민주를 통해 그 메시지의 전달 방식인 과격성과 메시지 자체를 균형 있게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서, 또는 여자가 아니라는 입장으로는 절대 서로 이해하고 배려할 수 없다. 갓난아이가 배고프고 졸리고 불편하다고 날카롭게 우는 것을 나무라지 않고 토닥여주는 것처럼, 피해자임에도 그녀를 감싸 안으려 한 백승하의 넓은 아량이 이 시대에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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