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60년대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 소설의 구도는, 예전에 읽었던 최진영 작가의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같은 시대를 다룬 양귀자 작가의 책 두 권을 최근에 읽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과연 은희경과 양귀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방점을 두고 책을 읽었다.
두 작가가 포착한 시대는 조금 다르다. 양귀자의 『모순』과 『희망』은 8090년대를 그려내고 있다면,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60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함께 묶어 보고 싶었던 이유는, 두 시대 모두 고도 경제성장기이자 민주주의가 서서히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공통점 덕분에, 두 작가의 작품은 그 시대를 살아갔던 대중들의 삶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다만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는 12살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당시 사회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진희라는 ‘애늙은이’의 눈에 들어온 풍경만을 통해 시대를 바라봐야 한다. 아무리 일찍 철이 든 진희라고 해도, 결국 그 나이라는 한계를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철이 일찍 든 아이의 시점을 사용한 만큼, 오히려 이 시대를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진희는 할머니와 이모와 함께 살면서 그들의 삶을 묘사한다. 독자인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시대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모가 어떤 방식으로 연애를 하는지, 광진테라 아줌마는 남편과 어떤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는지, 그리고 남편을 잃은 장군이 엄마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등, 이들의 삶을 통해 여성의 일상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씩 열거해보니 중심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 결국 이 소설은 여성 서사였던 것이다.
진희가 자라며 바라본 세상은 6070년대였고, 그녀가 성장해 한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가 되는 시기는 아마도 8090년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대를 이어가며 여성으로서 은연중에 느껴왔던 압박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2025년의 우리는 과연 그런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3대를 엮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이 떠올랐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왜 여성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진지한 서사를 느꼈는지…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소개하며 이 독후감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275p)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혼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명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 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 박광진씨를 통해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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