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과 2017년이 수시로 오버랩된다. 주인공 김유경의 삶을 중심으로, 그녀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특히 1977년의 회상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2017년의 김유경은 소설가가 된 김진희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작품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게 되면서 편집된 과거를 되짚는다. 이 소설을 계기로 김유경은 자신의 청춘 시절을 다시금 바라본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나에게 77년을 회상하는 김유경의 시선은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여대생들의 기숙사 생활은 어땠는지, 미팅은 어떻게 주선됐는지, 여대 안에서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있었는지, 여대생들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이었는지 등, 그 시대를 살아본 것처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빛의 과거』는 1970년대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작중에서는 홈커밍 행사 당일, 여대 기숙사에 각자의 손님을 초대하는 날 벌어진 사건이 묘사된다. 한 남자가 점호 시간까지 기숙사에 숨어 있었고, 이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관련 인물들이 퇴사, 퇴학, 자퇴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 남성이 과거 학생운동을 했던 인물이라는 점도 사태를 복잡하게 만든다. 그리고 당시 대학은 ‘지식의 상아탑’이자, 여성주의 사상이 고개를 들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어떤 여대생은 오빠가 서울에서 직장을 얻게 되자 뒷바라지를 위해 스스로 퇴사를 결심하기도 했다. 한 집안에 대학 보내야 할 사람이 두 명이면 “맞선다”는 표현도 있었다. 물론 그 ‘맞서는’ 대상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지금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관행들이, 당시에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이 소설의 구성 방식을 빌려 30년 후의 현재를 그려본다면 어떨까? 즉, 2055년에 2025년을 회상하는 이야기라면 무엇을 담게 될까? 예컨대 2024년 11월 있었던 동덕여대의 남녀공학 전환 반대 시위, 윤석열 대통령 관련 계엄령 및 탄핵 논의 같은 사건들이 주요 배경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의 사람들은 지금의 어떤 문제들을 주목할까?
타인을 깊이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설 읽기다. 7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을 잘 살펴보면 그 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을 만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화를 시도하긴 어렵다. 서로의 고정관념이나 아집이 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은 그런 장벽 없이, 조용히 시대와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여성 인권이 나아졌다’ 혹은 ‘아직 한참 부족하다’, ‘군 복무 문제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같은 말들은 성별 문제와 세대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간격을 조금이라도 좁히려는 시도가 바로 독서다. 그런 점에서 은희경의 『새의 선물』, 그리고 이번에 읽은 『빛의 과거』는 기성세대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또 어떤 책을 통해 후배들의 삶도 공감해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역시 간접 경험의 최고는 책이라는 점을 다시금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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