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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Art of Loving)

소한초이 2023. 12. 12.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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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기 전 제목에 대한 생각

 
사랑의 기술이라서 그래서 영문으로 Skill일 것만 같았는데 Art였다. 내가 아는 Art는 예술 밖에 없는데 어떤 의미일까? 라틴어 Ars가 Art의 어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숙련된 솜씨를 의미한다. 그러면 국문으로 좀 풀어서 쓰면 사랑의 숙련된 솜씨이다. 이렇게 표현해서 받아 들어보겠다.

2. 독후감

 
주어진 2주간의 시간은 짧고도 길었다. 결국에는 의지력 차이겠지만 1년마다 찾아오는 게임에 대한 열정은 의도치 않게 그 2주 동안 찾아왔다. 실제적 독서활동의 기간은 독서모임 기준 앞뒤로 3일 정도 그러니까 6일이었다. 독후감을 쓰는 이 순간에도 작문과 독서는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사색을 통해 에리히 프롬의 메시지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내가 조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폭발적인 몰입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순간을 바라보자면 단지 지적 고통을 유보하는 게으름일 뿐이었다.
 
독서모임 책을 선정한 당사자로서 어느정도 책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그전에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그 책임감 없이 열심히 읽고 정리하며 독후감을 써냈다. 그렇게 정리한 덕분에 에리히 프롬의 메시지가 내재화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번 독서에도 그런 경험을 기대했다. 하지만 먼저 말했듯 게으름과 게임에 대한 열정이 그것을 한 껏 방해했다.
 
요목 마다 내용을 정리하고 중간에 내 생각을 넣어보며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을 독후감으로 남겼다. 그러니까 진정한 독후감이 된 셈이다. 에리히 프롬의 책을 겨우 두 권 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두 번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단단하게 해주는 비료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은 혼자서는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또한 산파술로 진리를 깨우쳤다.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이고 일생은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분투기이다. 그리고 또한 가장 통감할수있었던 것은 사랑의 확장이었다. 사랑은 실천적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단번에 사랑의 빠지는 것보다 사랑에 머무르는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작위적이고 가식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 또한 사랑의 기술을 연마 중이었겠구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
 
또한 우연히 알파고 시나씨의 유튜브 채널에서 김영미PD의 라이브 방송 그러니까 2년 전 클립을 보면서 타민족에 대한 관심을 더 확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군부독재 하에 고통을 받고 있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연민이 갔다. 다큐멘터리도 찾아서 보고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보다 더 심하게 굴러간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 독서에서는 수 많은 질문이 오갔다. 그중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넘긴 것들도 많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삶의 태도가 능동적이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치렀던 최종면접이 떠올랐다. 인성면접이었는데 그 면접관은 내게 현실주의자냐 이상주의자냐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동물들이 행복한 나라가 인간들도 비로소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더불어서 정부에서 운영하는 동물보호소 봉사활동 이력을 스펙으로 제출했음을 어필했다. 지금은 동물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 이상을 품은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갔나 싶다. 그래서 내년에는 회사에서 봉사활동 참여하라고 독려하면 그 메시지를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해 볼 생각이다. 단지 나의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 말이다.
 

2-1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에 대해서 배울 게 없다 생각하는 사람의 세 가지 전제와 오류를 주장하고 있다. 먼저 사랑은 주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사랑의 문제는 능력이 보다 대상에 대한 문제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감히 가늠해 보자면 'Falling in love'과 'Staying in love'의 차이를 말해주고 싶은 것 같다. (Q1)
 
사랑이 기술이라는 것을 합의했다면 그 기술은 어떻게 습득할 것인가? 습득의 과정은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이다. 더불어서 기술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최대 관심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때문에 오로지 사랑에 쏟아야 하는 에너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로 흘러가기에 사랑의 기술은 외면되어 간다.
 

2-2. 사랑의 이론

2-2-1.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분리는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인간은 분리 상태의 극복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 그 대답에는 4가지로 추릴 수 있었다. 
 
우선 그 문제의 해결은 개인이 도달한 개성화의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시작은 어머니와의 일체감 또는 자연과의 일체감이었다. 원초적인 것에 벗어나게 되면 분리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 방법은 도취적 합일, 일치의 합일, 창조적 활동과 사랑이 있다. 도취의 합일은 마약, 성적 쾌락, 알코올을 사용하는 것이다. 공동 관습으로 채택된다면 올바른 방법이 되겠지만 그것이 개인의 선택으로 부여된다면 오히려 분리감을 더 증대될 것이다.
 
일치의 합일은 개인의 자아는 사라지고 군중이 대두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어 하고 개인주의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치지 않는다 말한다. 오늘의 평등은 일체성 보다 동일성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표준화를 원하고 이를 평등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이를 토대로 서양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는 알코올, 마약 중독과 강박적 성애와 자살은 군중과 일치에 실패했다는 사회적 징후가 된다.
 
창조는 외부세계를 나타내는 재료와 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창조의 과정에서 세계와 결합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노동과 일에서는 그 결합의 성질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와 같은 합일은 대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도취적인 합일은 일시적이며 일치의 합일은 사이비 합일인 셈이다. 이러한 합일은 실존에 대해 부분적 해답에 지나치지 않으며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 사랑이 무엇이란 말일까? 어의상의 어려움 때문에 해답이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합일이냐 이다. 사랑은 공서적 합일과 성숙한 사랑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 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마조히즘이고 능동적인 것으로는 사디즘이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둘의 관계에서 내가 그가 되거나 그가 내가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분리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랑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만 위와 같은 분류에 따라 합일에 대해 집중해볼까 한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닌 주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시장형 성격에서 벗어나서 생산적인 성격으로 본다면 그 행위 자체에서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그럼 무엇을 준단 말인가? 그의 대답은 생명을 준다고 한다.(Q2) 결국 생명을 줌으로써 받는 대상에게 되돌아올 때 두 사람 다 생명의 탄생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생명이란 것은 뭘까? 임신과 출산? 미궁으로 빠져들기 전에 난 여기서 손을 놓았다. 나머지로 능동적인 사랑의 여러 형태와 양성의 특징을 설명하지만 결국 위에 설명되는 합일의 근거보다 사랑은 복잡하고 난해하기만 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더 깊숙이 빠져드는 그런 효과만 남게 되었다. 게슈탈트 붕괴 임박이다.
 

2-2-2.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사랑의 능력의 발달과 사랑의 대상의 발달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독립해과는 과정과 어머니의 관계의 중요성이 아버지로 전달되는 과정을 기억해야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보다 원초적인 것에 가깝고 아버지의 사랑은 사회적 약속에 가깝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냥 오은영 박사님이 생각이 난다. 이런 부모님과 자식의 사랑을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 독후감을 4장부터 역순으로 써보니 알겠다. 결국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는 객관성이었다. 나의 사랑의 원천이 어떠했는지 바라보는 것이 시작이며 그것을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이지 않을까?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제공받은 육아환경은 앞으로 내가 생명을 나눠주는 그 행위, 사랑을 하는 태도로 직결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2-2-3. 사랑의 대상

 
사랑은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그러니까 한 개인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민족 더 나아가서 전 세계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랑이 차이 없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게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으로 정리했다. 사랑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Q3) 하지만 사랑의 5가지 형태를 살펴보면 그것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얻는 구심점은 대상으로부터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3.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먼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기본구조를 살펴보자는 이야기다.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가치가 단연 으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노동자는 시장에서 수요가 있는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야 한다. 그래야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하게 되고 여기서 말하는 노동력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자본은 인간을 지배하는 형태로 띄게 된다. 이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모이를 주는 그러니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 도취된 상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상호 성적 만족인 사랑과,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의 피난처인 사랑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표준적 형태다"라고 말한다. 사랑과 결혼의 개념은 분리 상태의 극복에서 벗어나 그 고독으로부터 피난처라 이야기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가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관계에 요점을 성적 만족에 방점을 두었다. 
 
그리고 또 사랑은 우상 숭배적 사랑이다. 사이비 사랑이라 부르며 또 다르게는 감상적 사랑이라 일컫는다. 이와 비슷하게 사랑의 추상화, 투사적 메커니즘, 어린아이들에게 투사를 이야기한다. 현실적 고통과 분리 상태를 완화해 주고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자신의 문제를 자식에게 투영하는 문제였다. 앞으로 4장에서 언급되겠지만 자기 자신의 이해가 부족한 상태를 상황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로 보는 환상이 있다. 갈등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경험하고 각자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기술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서 사랑은 합일인가?라고 바꿔서 질문하고 이것에 수긍한다면 결국에는 갈등은 필수불가결한 것일 테다. 그렇게 느끼지 않고 갈등을 경계하고 서로 무기를 쥐어진다면 그리고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다는 헛된 마음가짐은 붕괴의 중심에 서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 된다. 
 

2-4. 사랑의 실천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 경험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겸비하기 위해서 책에서는 4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먼저 실천하기 위해서 전제 조건을 살펴봐야 한다. 그것은 결국 어떤 기술의 실용에 필요한 것이다. 훈련, 정신집중, 인내는 우리가 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수행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또한 여기서 그 무언가에게 최고의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이 되었을 때 우리는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셈이다. 또한 오이겐 헤리겔의 <마음을 쏘다, 활>이라는 책을 소개해주며 활쏘기 장인을 언급을 한다. 이처럼 사랑도 장인의 영역이며 어떤 태도로 사랑의 실천을 바라봐야 하는지 그 시작점을 제시해 준다.
 
중요한 성질을 검토하길 원하면서 자아도취 극복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자아도취의 반대는 객관성이다. 동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동굴에서 형상화시킨 무언가로 세상을 투영해 보이길 마련이다. 타인의 배려와 친절을 왜곡하여 받아들이수도 있는 점에서 유익하지 않다. 결국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길 원하며 모든 상황에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객관성에 민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의 실천이다. 신앙은 자기 확인인 합리적 신앙과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인 비합리적인 신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합리적 신앙만큼 비합리적인 신앙 또한 중요하지만 합리적 신앙에 대한 내용이 더 많고 그것이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용이하기 때문에 첫 번째 신앙을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합리적 신앙은 생산적 지성과 정서적 활동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아마도 이런 개념은 "줏대 있는"으로 쉽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사랑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활동이며 그 실천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길 원한다. 비단 개인적인 영역에서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영역과 연관시켜야 하며 그것은 불가분 하다. 자본주의 사회와 사랑은 대립하는 가치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고 노출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본인의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 그 궁금증을 해소하라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작년에 읽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또한 무관심에 대한 내용이기에 참고가 될만하겠다. 
 

5. 인상 깊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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