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

1. 읽게 된 계기

 
내가 좋아하는 조승연 작가의 유튜브에 요한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 소개가 되었다. 사실 집중력에 관한 유튜브 클립은 최근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광고되고 있는 책을 쉽게 읽고 싶지 않았다.
 
독서모임에서 타너스님이 아주 살짝 도둑맞은 집중력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아마 타너스님도 어떤 마케팅에 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이나 쉽게 읽고 싶지 않았다. 나도 마케팅에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 하리의 <물어봐줘서 고마워요>를 먼저 읽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절반 정도 읽은 시점에 비로소 지금은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읽게 되었다. 
 

 

 

2. 독후감

 
멍청해지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였다. 고2 때부터 스마트폰을 제대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한 손에 영상 클립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 아프리카TV와 유튜브를 보는 시간도 많이 늘어났다. 텔레비전이 처음 발명되고 보급되었을 때 흔히 바보상자라 칭해졌고 그 별명을 동의하지 않았다. TV를 보고 있는 나를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은 많이 보면 머리 나빠진다고 이야기를 했다. TV에는 유용한 프로그램도 많았기에 그들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이제는 그들의 애정 담긴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그 문제를 간파하고 잔소리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TV가 아니라 광고가 문제였을 것이다. 스마트폰도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광고가 문제였다는 것을 이 책에서도 이야기해 준다. 집중력에 대한 개인의 의지를 배제할 수 없겠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 사회문제로 넓게 봐야 한 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쉽게 말해 석박사들이 머리를 모아 우리들이 어떻게 스마트폰에 좀 더 오래 머물까 고민하고 알고리즘을 짜는데 그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과연 어떤 개인적인 노력을 하고 있을까? 그 노력에는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소극적인 노력으로는 구글과 유튜브 시청기록을 중단하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탈퇴하고 최근에는 네이버카페 어플을 삭제했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고 정처 없이 이리저리 앱을 켜고 껐다. 그 앱이 보여주는 콘텐츠가 있으면 그것을 소비했다. 결국 그 콘텐츠는 내가 원하고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굴레를 끊고 싶어 앞서 이야기한 소극적인 행동들을 결심했다. 

 

 

 

적극적인 노력은 알고 있지만 쉽게 실천할 수 없었다. 적극적인 노력은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주는 것이다. 직장에서 보고서 작성에 열중할 때나 운동할 때 그리고 독서모임 할 때는 확실한 몰입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외에 시간에는 항상 스마트폰의 유혹에 노출이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어떨 때 내가 의미 없이 유튜브를 보고 콘텐츠를 소비하는지 그 패턴을 파악하고 고쳐가야 했다. 자기 전에 유튜브 보는 것을 끊기에는 참으로 쉽지가 않다. 어느새 수면루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책에서도 나왔듯이 이 습관은 수면의 질을 저하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원인이 된다.

 

독서모임을 처음 결성했을 때 만났던 마스쿤님이 생각이 난다. 그는 유튜브 시청을 줄이기 위해 집에 와이파이를 없애버렸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가벼운 네오러다이트 운동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의 분투기는 다시 와이파이를 들이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은 개인의 노력은 이처럼 어렵다는 이야기다. 책에서 요한 하리는 비단 개인의 노력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시사점을 제공했다. 구독형이나 국유화시킨 SNS서비스라면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앱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구독형이라는 개념을 제시해서 부분유료화게임이 연상이 되었다. 유료게임이 좋은지 부분유료화게임이 좋은지는 감히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리 게임사에게 돈을 지불한 경우 유저들에게 수익을 내기 위해 개입을 적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집중력을 도둑질하는 대상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져보자. 자본주의가 감시 자본주의로 거듭나면서 도둑질이 좀 더 교묘해졌다. 대상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도둑질을 쉽게 알아차릴 수도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 또한 없다는 것이다. 10년 전쯤 유행처럼 번졌던 미니멀리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미니멀리즘의 핵심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에 한 명확한 성찰이다. 오히려 물건을 버렸을 때 도둑질에서 이겨내는 것을 느낀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고 그래서 미니멀리즘으로 자리 잡은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ADHD에 대한 내용은 요한 하리의 전 작품인 <물어봐줘서 고마워요>와 연결이 된다. 우울증이 과연 약물처방으로 해결될 수 있나에 대한 물음의 논리가 ADHD에 대해서도 똑같이 전개가 된다. 항정신과 약을 먹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요한 하리는 자신의 우울증 경험담을 포함해서 이야기했다. ADHD도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면을 살펴보는 것보다 약을 처방해 주는 것이 비용적으로 싸다. 우리 사회가 비용적인 문제로 개인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해진 것이 개탄스러웠다. 인류의 시작부터 집단생활을 했던 우리가 전지구적으로 개인화가 되면서 이루어지는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갑자기 뜬금없게 들리겠지만 사랑이 이 문제의 키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사랑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서 비롯됐다.

 

거대한 풍채를 가진 골리앗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 해 보였다. 하지만 다윗은 그 골리앗을 무찔렀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감시 자본주의와 거대한 테크기업에 굴복하지 않고 이겨내려는 끈기와 지구력이 필요하다. 옛날보다 지금은 우리의 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침투하고 굴복하게 만든다. 이길 수 있는 노력은 그 존재를 인식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뭔가 멍청해진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그 이유가 감시 자본주의와 테크기업들의 알고리즘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개인에게 부여된 책임감을 덜어주었다. 단연 유튜브 중독에 빠진 것이 나의 게으름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앞 세대에 납중독에 대한 관심이 납중독으로부터 자유로운 지금이 되었다. 우리가 있는 이 시대에 집중력을 찾는 노력들이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에게 값진 열매가 되기 바라면서 작고도 개인적인 노력들을 사명감 있게 해 보겠다 결심 내렸다. 내 아이들은 부디 집중력을 지켜내길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