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1. 제목을 보고 읽기 전에 감상

두 단어의 조합이 이질적이었다. 달과 6펜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추상적으로 달에 궁전을 지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미궁이었다. 달과 궁전은 공간을 뜻하는 단어이다. 궁전은 특정한 계층이 거주하는 공간이며 일반인과 구분이 된다. 그렇다면 달의 궁전이라는 말을 좀 더 생각해 보자. 달의 궁전을 선언하려면 우선 달의 거주자가 있어야 한다. 아르테미스 계획의 여러 목표 중 달이 화성 및 다른 행성 탐사의 전초기지가 된다면 거주자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곳에 궁전이 생길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궁전이라는 공간과 건물은 권력이 집약된 곳이다. 권력자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곳이기도 하다. 달이 식민화가 되어서 그곳에 독재자가 있다면 가능할 일이다. 그렇다면 식민화된 달의 궁전에 일어나는 일을 나타내는 책일까? 그렇다고 생각해 보면 책 제목과 내용이 너무 일치해서 재미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이 SF소설이라고 해도 어울릴 것 같다. 
 

2. 독후감

2_1. 관통당함

 

먼저 런업이라는 유튜버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트렌디한 패션 유튜버이다. 그의 영상 편집 센스가 마음에 들고 그의 인사이트가 마음에 들어서 19년쯤부터 구독하고 있다. 현재 그는 26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런업을 통해서 관통당한 느낌을 두 번 받은 적 있다. 첫 번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된 야수파 걸작전을 보고 나서였고 두 번째는 폴 오스터와 이번 독서였다.

19년 어느 여름에 야수파 걸작전을 본 적이 있다. 여느 전시를 좋아했던 나는 전시일정을 알아보는 것이 일종의 낙이였다. 야수파 걸작전을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관람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런업의 남동생이 그 큐레이터라는 것이었다. 야수파 걸작전이 전시 중에 있을 때 런업의 클립을 보았었고 그중 그의 남동생을 잠깐 설명했던 순간이 있었는데 완전 소름이었다. 뭔가 제대로 관통당한 느낌이 이때 처음이었다.
 
https://youtu.be/Ox1vhedI2ZM


폴 오스터는 내게 생소한 작가이다. 들어보지도 못한 작가였다. 이름이 오스터라고? 오이스터를 번역하면 굴 아닌가? 참 이상한 이름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런업의 최근 영상을 보았을 때 다시 한번 관통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출장 차 뉴욕으로 갔을 때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구겐하임 뮤지엄에 갔다. 뉴욕 유학시절 그곳에서 폴 오스터의 리딩회를 본 적이 있었고 리딩회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회상을 했다. 그렇게 폴 오스터를 처음 들었던 내가 폴 오스터로 그와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새로 알게 된 작가와 읽은 책으로써 접점이 없을 듯 한 인물과 연결되었다. 기대할 수 없었던 우연한 접합이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시킨 그런 쾌감이었다.
 

23년 어느 봄에 클립

2_2  달의 궁전을 읽고

소설을 읽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건 되게 오랜만인듯하다. 보통 읽고 나면 이 소설이 내게 주는 여운과 메시지가 한동안 떠나지 않고 내 마음속에 머물렀다. 이윽고 그 넘치는 감동을 글로 표현해 승화시켜 기록하곤 한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 남았는가 되짚어 봐야 한다. 한참을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다. 그것도 이전과와 다른 의미로.
 
외삼촌 빅터 포그의 상속물이었던 책 꾸러미들은 앞으로 마르코 포그가 총명해질것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그리고 책이 담긴 박스를 볼 때 내 방의 모습과 비슷해서 정겨웠다. 그는 그 박스를 가구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나 또한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몸 하나 간수 못하는 시각장애인 노인 토머스 에핑과 마르코 포그를 보고서는 프랑스 영화 [언터쳐블 : 1%의 우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20세기초이기에 피츠제럴드 위대한 게츠비가 생각났다. 배경 또한 미국에 동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너무 억지로 내용이 이어지고 결말지어지기 때문에 반감이 갔다. 사생아 인 줄만 알았던 마르코 포그는 사실 아버지가 살아 있었고 그 아버지가 토마스 에핑의 아들이었다. 에핑과 포그는 함께 지내며 에핑의 일생을 듣게 되었다. 에핑 죽기 전 유산으로 자서전을 남기기 위해 자서전을 포그가 쓰게 되면서 더욱 깊어져갔다. 그리고 그 자서전을 그의 아들에게 전해 달라는 유언을 지키게 되면서 줄리언 바버와 마르코 포그가 이어지게 되었다. 사실 복잡하지도 않은 관계의 사슬들이 풀리게 되면서 너무 억지스러웠다.
 
대학동기의 집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키티와의 연애는 중요한 듯 여겨지다가 에핑의 에피소드로 넘어가게 되면서 비중이 줄었다. 하지만 마르코 포그와 줄리언 바버 사이에 오작교 역할을 하게 되면서 그녀의 중요도가 그리 낮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마르코 포그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낙태를 하게 되고 점점 그들 사이는 소원해진다. 바버의 사고사 이후에 포그는 뒤늦게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이미 그녀는 빈자리를 다른 누군가로 채웠다. 에핑이 지냈던 그리고 바버가 가보자고 했던 그 동굴을 가보는 것으로 실연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어떤 것을 방점을 찍고 이 소설의 메시지를 가져가야 할까 가늠이 가지 않았다. 냉전시대에 미국의 상황, 세계대전을 겪은 기성세대들, 병든 자와 동거, 아버지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까지. 오히려 주제와 소재가 복잡해서 혼란스러웠다. 맛있는 술과 시럽을 가득 채운 칵테일은 이 맛도 저 맛도 아니게 되어 맛없는 술이 된다고 한다. 마치 그렇게 이상해졌다. 
 
가장 미궁인 건 달의 궁전이라는 제목이다. 어떻게 해서 이 제목이 붙여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설의 초반 대학 기숙사에서 아파트로 이사할 때 보았던 중국집 달의 궁전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단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돈을 탕진해 버린 식당이었다. 그런 장소가 달의 궁전인데 말이다. 초반부에 대만 출신인 키티가 나왔을 때 중국집인 달의 궁전과 접점이 생기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에핑이 나오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문득 빨간 책방의 이동진 작가님이 그리워지기만 한다. 누군가가 멋지게 설명해 준다면 좋겠다.
 
3주 만의 시간에서 5일의 시간을 가지고 완독을 했다. 나머지 시간을 다른 책을 읽거나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며 시간을 허비했다. 이번에 느끼는 것은 독서와 글쓰기에서도 뜸 들임과 삭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책을 읽고 곧 장 글쓰기를 감행했다면 스토리 위주의 독후감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늑장을 부렸다는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를 하기 전에 런업의 클립을 보게 된 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폴 오스터라는 작가를 이야기할 때 동질감과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것 보다 고급진 연결고리가 책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구독하는 유튜버를 공유하는 것과 너도 구독했어?라는 말은 함께 나눈 자와 함께 동질감을 가지게 된다. 결국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는 느낌과 스펙트럼을 넓히게 되는 방향이 어떤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없어질 때 담아낼 수 있는 용량도 넓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언제 어떻게 관통당함을 준비하기 위해 부단히 여러 책을 섭렵해보고 싶다. 물론 독서모임을 통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