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 제목만 보고 감상

1.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제목 지극히 개인적인 제목이었다. 어감이 톰소여의 모험 같기도 하다.
 

2. 제 꿈을 꾸세요

꿈을 사라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다. 그런데 나의 꿈을 꾸라니 무슨 말일까?
 

3. 버섯 농장

부모님 집 베란다 너머로는 공원이 보인다. 그리고 그 공원 너머에는 왕복 8차선 도로가 있다. 집에서 도로로 나가려면 공원을 통해 오솔길을 거쳐야 한다. 그 오솔길의 끝에는 버섯재배 하우스가 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시커멓고 습기가 가득한 그곳 그곳이 생각이 난다.
 

4. 젊은 근희의 행진

행진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가 있다. 군대와 모차르트이다. 젊다고 하는 근희 씨는 현재 젊은 사람일까? 아니면 젊은 날을 회상하는 근희 씨일까? 그 둘 중 누구더라도 박차고 삶은 개진해 나갈 진취적인 사람일 것 같다.
 

5. 요카타

한글로 그냥 바라보면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 내어 읽어보니 일본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카타 그러니까 다행이다라는 말이다. 제목이 일본어라 특별하게 느껴졌다. 제목이 일본어인 만큼 내용도 어떤 연관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6. 자개장의 용도

자개장을 검색해 보았다. 나전칠기가 나왔다. 그게 그거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깊숙히 케케묵은 채 잠들어 있던 단어가 꺼내진 느낌이었다. 자개장은 내게 그런 느낌이고 단어였다. 잊고 있었던 것이 나오게 하는 것이 자개장이었던 것처럼 책 내용에서도 그럴까?
 

7. 연필 샌드위치

어울리지 않은 단어의 조합 또 나왔다. 샌드위치를 수식해 주는 연필 우리는 어디에 초첨을 둬야 할까? 재료가 이상하다는 것과 수많은 먹을 것 중에 샌드위치라는 것 중 무엇을.
 


 

2. 독후감

 
읽기 전 부터 7개의 작품 중 어떤 작품을 선정해서 독후감을 써야 할까 꽤나 고민이 되었다. 당연히 대상을 독후감을 써야 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이하 모래고모 통칭)의 첫 페이지를 읽고 그런 생각을 고이 접어두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풀이 죽어버렸다. 그리고 약간의 삐뚤어진 보복심리로 7개의 작품 모두 독후감을 써내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그 마음과 결심이 계획으로 진행되지 않아 허송세월 지나가버렸다. 결국에는 하나에 대한 독후감을 쓰거나 전체적인 독후감을 써내려 갈까 한다.
 
가볍게 이야기하면 쉬운 소설 그리고 좀 더 고급지게 이야기하면 마음을 울렸던 소설을 순차적으로 나열해보고자 한다. 아니 역순으로 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제 꿈을 꾸세요 = 연필 샌드위치 > 모래 고모 > 자개장의 용도=버섯 농장=젊은 근희=요카타. 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요카타, 젊은 근희, 버섯 농장이다.
 

2.1 요카타

가장 감동이 되는 형태의 소설이었다. 과거의 현재와의 융합이라고 해야 할까? 세대통합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을 통해서 화합을 이루어 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접적인 형태를 띤 이런 소설을 가장 좋아한다. 문득 생각나는 비슷한 소설은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이 생각이 난다. 은근슬쩍 역사를 생각하게 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유익함이 단연 으뜸이다.
 
만 백 살이 된 할머니가 여성의 날에 라디오 전화 인터뷰를 하게 된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와 소설 속에서 할머니를 대하고 있는 그들과 얼마나 다르고 차이가 날까? 사회복지사 유진과 라디오 작가는 할머니를 정녕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3.1절이 100주년이 되었고 여성의 날에 특별 게스트로 할머니를 모시어 인터뷰를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그 취지에 맞게 청취자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담당자는 뭔가 모를 사무적인 느낌이었다.
 
할머니가 서연화라는 세련된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귀 기울여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요양원에 몇 달 지내셨다. 다행히 인근 마을 요양원이라 덜 답답해하셨지만 할아버지는 매번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셨다. 2인실이었던 할아버지 병실에 병문안을 가면 항상 옆에 누워있는 시끄러운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자기의 기구한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라 이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어느 누구 하나 관심 있게 듣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나도 측은지심이 들어 관심이 가다가 아차 싶어 할아버지의 대화를 무시했다. 
 
그 할아버지의 가족들이 원망스러웠다. 왜 자주 오지 못해서 생면부지인 나에게 할아버지의 푸념을 듣게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뭐 이리 말이 많고 목청도 크신지 모르겠다. 그 할아버지가 주장한 바에 이르면 이루어낸 업적이 엄청 많고 자식 농사도 건실했다. 근데 말년에는 외진 섬에 요양원에 계신다. 아이러니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과묵한 편이었는데 그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게 더 아이러니했다.
 
하나의 라디오 프로그램과 같이 좀 멀리서 바라보면 존경스럽고 대단한 우리들의 기성세대 할머니 할아버지분들을 바라볼 때 내 마음속에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동시에 부끄러운 감정을 느꼈다. 표리부동이라는 사자성어도 생각이 났다. 노인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리도 이중적이고 음침한지 나의 불량함이 상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