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광양독서모임 커넥트 중간점검

2020년부터 시작된 독서모임에서 몇 번의 휴식기를 가졌지만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달려왔다. 마스쿤님의 부재 이후 독서모임을 맡아서 운영하기 시작했고 3개월의 안식을 가지고 나서는 타너스님이 그 역할을 대신해 주셨다. 이제 타너스 님이 없는 이 상황 속에서 칼린다님이 이어서 그 일을 도맡아 해주고 계신다.
 
독서모임이 삐걱 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는 지금 내가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을 때의 시절을 돌이켜 보고자 한다. 우선 독서모임의 확장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맴버들의 적극성을 요구했다. 글쓰기의 유익함에 대해 피력, 완독의 중요성 그리고 약속에 대한 경고. 이렇게 세 가지를 자주 이야기 했다. 마스쿤님이 없어서 좀 더 힘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멤버들을 더 옥죄어갔다. 이제는 글쓰기를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완독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한 명이라도 찾아온 것만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근데 이건 나의 마음가짐인데 독서모임이 이렇게 굴러가도 괜찮은 건가 싶다. 독후감을 써달라는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책을 다 읽어오는 것과 약속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지 않을까?
 
기준선이 마스쿤님에 다 맞춰져 있고 그를 너무 신격화하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그가 사회자였을 때 나의 만족도가 최고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를 그리워할수 밖에. 독서모임을 할 때의 사회력이 마스쿤님 보다 딸리는 것은 나 자신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날은 정말 사회 잘 보았다 했을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의 가능성도 낮지 않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회력에 욕심을 가지게 되면 독서모임은 보다 더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해진 주제에 벗어나면 눈살이 찌푸려지고 본론으로 다시 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더 이상의 삼천포는 허용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소외받지 않게 전체 분위기를 살피는 것은 기본이었다. 믿음님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의 고민은 쉬는 시간과 흡연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중간에 쉬지도 않고 쭉 나아간다. 믿음님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모든 멤버들이 최고의 컨디션에서 독서모임을 가지길 원한다. 
 
사회를 보는 도중에는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사회자 독서모임이 잘 굴러가게 하는 하나의 도구이자 장치였다. 너무 부정적으로 들리나 싶지만 나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타너스님이 사회를 봐주셨을 때 그전과 다르게 독서모임 회의록을 더 잘 쓸 수 있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다른 종류의 경청을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를 보고 있을 때는 흐름을 맞추기 위해 소외되지 않기 위해 그들의 말을 경청했더라면 지금은 그 사람의 메시지가 뭘까? 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독서모임을 참여하는 개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메시지를 캐치하는데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겠지만 내가 과연 참여자의 위치에서만 있어야 될까? 20년 6월부터 시작된 독서모임에서 그만두지 않고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나뿐인데 나라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나의 독후감을 낭독하고 독서모임에서 선보일 기회가 없다. 그 마저도 요약을해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현장에서 요약을 하려고 하니까 말도 꼬이고 실수도 많이 하게 되었다. 항상 그럴 때마다 멤버들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요즘의 독서모임의 문제점은 너무 자유롭다는 것이다. 규율이 없다는 말도 된다. 예를 들어 나와 데이나님이 종종 모든 이야기를 한 번에 쏟아 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생각이 들었던 것은 누군가가 이 긴 호흡을 끊어줬으면 했다. 사실 누군가가 호흡을 끊어주지 않더라도 미리 정해둔 규칙으로 그 호흡을 짧게 가져갈 수 있다. 우리가 이제껏 해왔던 3 형식의 형태처럼 말이다. 지금은 3 형식의 진행이 무의미해지게 식어가고 있다. 그리고 3 형식의 진행이 잘 된다고 하더라도 2 형식에 배치되어 있던 독후감을 새롭게 개편해야 되는 필요성을 느낀다.
 
과거 2형식의 독후감은 서로의 독후감을 낭독하는 시간이었다. 독서모임 처음 했을 때와 코로나시기로 비대면 독서모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서로의 독후감을 보고 낭독하는 것을 듣고 그것에 대해서 궁금증이나 질문거리가 있으면 질문하곤 했다. 그런 의미는 서로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건지 미리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미리 독후감을 카페에 올렸으니 말이다. 적어도 독서모임 약속시간 전에 올려준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낭독의 의미는 퇴색되어 갔고 독후감을 미리 써오는 사람은 거의 나뿐이며 질문도 한정적이다. 요즘 가장 걱정되고 거슬리는 것은 독서모임 중에 정적이 흐를 때이다. 서로 눈치만 보고 배려하는 바람에 보이스가 빈다. 서로 준비가 부족한 것도 한 몫한다. 준비에 대한 의미는 잘 이해하고 있다. 내가 독서모임 사전준비를 잘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독서모임의 질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멘소리 한다고 해도 이 과정들을 쓸데없는 시간들이라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3개월의 안식을 가지기 전에 인삿말로 독서모임의 소유욕과 정 때문에 잠시 쉰다고 이야기했다. 독서모임이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고 리더로서 채찍 드는 것을 인색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전 보다 어른이 되었다고 표현해도 될까? 기다릴 줄도 알고 나의 욕심이었다는 것도 확인했고 좀 더 배려할 줄도 알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입맛대로 타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순서 상 칼린다님이 사회를 보고 계시지만 부탁드려서 다시 내가 사회를 볼까 고민이 된다. 그녀의 자질에 대한 의심 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서 독서에 열정을 가지고 현재 장기적인 독서 권태기를 이겨내기 위해서이다. 흐리멍덩한 독서모임을 다시 견고하게 재건하기 위해서 나부터 정신을 차려야겠다. 소극적인 태도로는 나부터 독서모임 준비를 잘해가면 되지 않을까? 일 테고 적극적인 자세로는 사회를 다시 내가 보고 중앙집권적인 리더가 되어 기틀을 잡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