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오랫동안 "인간이 왜 인간을 죽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우리 인간사에는 학살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갈등이 있으면 전쟁이 있었고 양민학살도 있었다. 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서로 죽이게 되는 것일까?
인간의 갈등은 모름지기 욕심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갈등이 첨예하게 빗어지면 서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 그렇게 편이 갈라지게 된다. 그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타협을 하고 풀면 그만인데 그게 쉽게 되지 않는 것이 인간사이다. 근데 이게 왜 죽음까지 이어져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
이 물음의 시작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많은 책들이 거쳐왔다. 이데올로기에 취해 있던 그간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그리고 정치적 편견이 어떻게 해서 시작이 되었는지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랑이라는 기술을 연마해 보자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여행의 테마를 수용소 탐방으로 잡게된 것은 24년 상반기에 대학살을 주제로 제주도와 캄보디아를 찾은 내가 여름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서 언젠가 아우슈비츠를 가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2. 나치 수용소 탐방 (24.09.30 ~ 24.10.12)
1. 다하우 수용소
2.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3. 라벤스부뤼크 수용소
4. 작센하우젠 수용소
5. 아우슈비츠 수용소
6. 비르케나우 수용소
2-1. 다하우수용소 (Dachau Concentration Camp Memorial Site)
첫 탐방지로 뮌헨을 찾은 이유는 다하우수용소에서 시작해서 아우슈비츠까지 가는 경로로 여행을 설정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때 옥토버페스트가 있어서 숙박비가 2배 올라있었고 관광객들도 넘쳐났다. 괜히 억울했다. 내가 뮌헨을 찾은 이유는 다하우수용소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여행을 함께 동행한 친구는 옥토버페스트와 마리엔광장을 구경하러 갔고 나는 다하우로 향했다.
S반을 타고 도시외곽으로 나가면 다하우라는 소도시가 있고 거기서 버스를 타면 수용소로 바로 갈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먹고 수용소를 찾은 수용소 중 다하우수용소가 첫 번째 수용소가 되었다. 긴 줄을 기다리며 쓸데없는 오디오가이드를 빌렸다. 50%만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 오디오가이드가 금방 싫증이 났다. 새삼 이럴 때마다 중국인이 부럽다.
이곳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수용소 부지가 굉장히 넓다는 것과 그 수용시설이었다. 그리고 수용소 안에 종교시설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기독교, 천주교, 유대교 종교시설이 다 구비되어 있는 큰 수용소였다. 그리고 또 놀라온 것은 수용소 안에 또 감옥이라는 시설이 있었다는 것이다. 수용소안에는 법을 어긴 사람들이 구속된 것이 아니었다. 그 수용소안에서의 규칙을 어긴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시켰고 자연스럽게 형벌과 감옥행으로 이어졌다.
다하우 수용소는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다 부서졌다. 그 이유는 오디오가이드로 들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 곳곳마다 사진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서 여기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의 심정을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수용소 본부 맞은편 교회에 계단 턱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허물어진 건물들을 원래대로 복구시켜 봤다. 30동이 넘는 이 공간에서 모두 다 점호받는 상황을 상상해 봤다. 경계는 삼엄했고 주위는 높은 벽으로 쳐져있었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구조이다. 이곳에서 나는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죄목으로 이곳에 오게 되면 어떻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면 알겠지만 수용소 인근에는 병사와 장교숙소가 있다. 다하우수용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그냥 군부대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내가 복무했던 공군을 떠올려보더라도 활주로와 군부대시설이 있고 병사숙소와 장교숙소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아파트가 있었다.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라면 쉽게 이 상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더욱이 자의적으로 군입대를 하지 않는 우리나라 특성상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의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뮌헨에 오기 전 일주일 전에 초가을에 차가운 스무디를 먹고 배탈이 났었다. 그래서 기력도 없는 것이 오히려 이때 상황을 좀 더 극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2-2. 플로센뷔르크 수용소(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 Memorial)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수용소였다. 다하우수용소에서 한 지도를 보고 다음으로 갈 뉘른베르크 주변에도 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흥적으로 계획을 변경해서 찾아갔다.
가는 길이 좀 험난했다. 24.10.03은 통일의 날로 공휴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차 편도 평소와는 달랐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가 탄 기차는 어느 역에서 정차하더니 무한대기 끝에 다른 기차로 변경되어 갈아탔다. 플로센뷔르크에 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바이덴 혹은 네우스타드에서 버스 타면 된다. 가장 골치 아픈 점은 돌아오는 버스가 플로센뷔르크에서 딱 한대 있었다.
기차의 종점인 네우스타드역에서 내리고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유일하게 영업하는 카페에 들어갔다.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키고 앉아서 버스가 진짜 오는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카페주인이 갑자기 나를 수용소까지 태워줄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놀랍고도 아주 편하게 수용소까지 갈 수 있었다.
도착한 것은 오후 1시 정도였는데 버스는 오후 4시에 있다. 나를 태워준 수미(Sümi)라는 사람은 번역기를 사용해 가며 영어로 나를 다시 픽업하러 오겠다고 이야기했다. 자기는 뒤에 탄 여자(엄마로 추정됨)와 사우나를 갔다 온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를 경계해야 되는 것이 당연지사지만 재밌을 것 같아서 그녀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 수용소는 다른 수용소보다 콤팩트한 수용소였다. 다하우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파괴가 되었고 수용소 인근에 장교숙소와 집들이 옹기종이 있었다. 이곳은 특징적으로 광산업 특화 수용소였다. 수용된 사람의 대부분을 채광업무를 시켰다.
플로센뷔르크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교회 맞은편에 시체를 태우는 화장터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보다 저지대에 있는 화장터로 가는 길은 S자 꼬불길인데 이 길을 죽음의 길이라고도 칭한다고 했다.
반강제적으로 수용소에서 있어야 할 시간이 많아서 이곳저곳 누비며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다하우수용소에 있었던 것처럼 한 곳에 진득하게 앉아서 수용당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지하에 샤워실이었다. 이곳에서의 샤워는 강제적으로 행해졌다. 위생관리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용소를 관리하는 군인들의 통제하에 진행이 되었다. 위생관리는 곧 노동인구 관리인셈이기도 했다. 샤워방식은 한 공간에 몰아넣어 차가운 고압수를 쏘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맨 앞에 있는 사람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곳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나치가 패전하고 나서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사형 또는 죽음의 행진으로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전쟁 중에 수용소에서 죽이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데 전쟁이 끝났는데도 왜 이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2-3.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Ravensbrück Concentration Camp Memorial Site)
여기도 마찬가지로 원래 계획에는 없던 수용소였다.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본 지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원래는 베를린 인근 작센하우젠 수용소를 방문하려고 했는데 좀 더 욕심을 가져 이곳 라벤스브뤼크 수용소까지 오게 되었다. 작센하우젠수용소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는 기차로 약 한 시간 정도 걸려서 좀 빠듯하게 움직이면 두 곳 모두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퓌르스텐베르크역에서 30분을 걸어가면 이 수용소에 다다를 수 있다.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는 다하우수용소만큼 크고 여성전용 수용소로 이름나있다. 그리고 호수를 끼고 있는 특징적인 수용소이다.
둘러 다녀보면 정말 여러 민족과 나라 출신 여성들이 수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과연 여성의 몸으로 할 수 있을까 싶은 노동을 하기도 했다. 어느 수용소를 가던 항상 나는 화장터를 찾아보는 것을 좋아한다. 디자인적으로 화장터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수용소마다 다 달랐다. 이곳 라벤스브뤼크는 본부 바로 옆에 수용소가 있었다. 다하우와 플로센뷔르크 수용소는 본부와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특이점을 찾아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앞서 봤던 화장터를 찾아보며 느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과 화장터처럼 대량살상을 하기 위한 수용소는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시체관리는 즉 위생관리였고 위생관리는 노동력관리였다. 수용소를 관리하는 장교 및 관리자는 이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로 들어온 지는 무관심하고 어떻게든 최대 효율로 노동력을 뽑아낼까 고민했을 것이다.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주거환경은 이곳 사람들이 지내기에 터무니 없는 환경이었고 자연스레 허약해졌을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숙소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 소장의 집이었을 것 같다. 이곳의 집이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본 것처럼 비슷했기 때문에 눈길이 갔다. 문 앞에 나서면 바로 본부가 보이고 수용소 입구가 보인다. <공간의 미래>를 쓴 유현준교수의 말처럼 권력은 비대칭성을 띠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볼 수 있는 구조는 권력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전쟁범죄를 가담한 나치의 장교와 그의 가족들의 삶은 그저 평범한 삶이었다는 것을 묘사한다. 나치장교는 열심히 일을 했고 아내는 내조를 열심히 했다. 열심히 하는 것에만 심취한 나머지 도덕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인가? 물음을 던저주는 영화였다.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곳에 어떻게 수용소가 자리하고 있는지 의문이면서도 그때 그 시절에 누군가에게는 한낱 가벼운 일상인 곳이기도 하겠구나라고 느낀 수용소였다.
2-4. 작센하우젠 수용소 (Sachsenhausen Memorial & Museum)
뮌헨의 다하우수용소와 베를린의 작센하우젠 수용소는 도시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그 말은 사람들이 많이 붐빈다는 뜻이다. 하지만 드넓은 대지에 비하면 그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도 갑갑함이 들지 않는다. 수용소의 부지는 그만큼 넓다.
4번째로 찾은 수용소다. 이제껏 나치수용소를 찾아다니면서 세계 2차 대전과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더 자세한 역사공부는 하지 않았다. 변명이지만 그저 그곳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느끼고 싶었다. 수용인들과 관리자 모두 다 말이다.
수용소가 거기서 거기 다 똑같지 않으냐 물어본다면 아쉬운 소리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작센하우젠은 그 푸념에 얼추 답변이 될 거라고 자부한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모습은 대부분 각진 직사각형으로 디자인한 것에 비해 부채꼴 혹은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파놉티콘 구조를 떠올려보면 수용소에서의 감시효율을 높이려는 의도가 보인다. 파놉티콘 구조를 띤 감옥은 가운데 간수가 있는 탑이 있고 각 변에 죄수의 방이 있다. 간수의 탑의 조명을 어둡게 하고 죄수들의 방을 보다 밝게 한다. 이렇게 설계하면 간수는 모든 죄수를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의 유무조차 확인할 수 없다. 이처럼 작센하우젠 수용소 또한 삼각형의 중심각에 서 있으면 모든 곳이 다 보인다. 점호 때 수용소 인원을 파악하기 쉽게 하기 위한 디자인이지 않을까? 유추하며 수용소를 구경했다.
어느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수용시설은 다 파괴가 되었다. 그리고 감옥과 사형대 그리고 화장터는 울타리 밖에 따로 구분되었다.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도 전쟁이 끝나고 해방되지 못하고 죽음의 행진 대열에 속하게 되었다. 작센하우젠을 가기 위해서 오라니엔부르크역에 갔어야 했고 거기서 걸어서 작센하우젠으로 가다 보면 죽음의 행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번 독일여행을 하면서 하루에 3만보씩 걷게 되었는데 이 행군이 어떤 고난인지 심히 공감이 되었다.
도대체 해방시켜주지 않고 죽이는지 의문이고 또한 왜 숫자로 우세한 수용인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않았을까?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무작정 걸으라고 해서 걸었고 걷다 보니 먹을 것도 없고 추워 죽게 되었다. 도망가면 총살이고 너무나도 끔찍한 결말이다. 전쟁이 끝났는데
2-5.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Memorial and Museum Auschwitz-Birkenau)
2-5-1. 아우슈비츠 제1 기념관
우선 폴란드어로 아우슈비츠는 오시비엥침이라고 한다.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서 오시비엥침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구경하러 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총 2개의 섹션이 있다. 지도에서는 Memorial and Museum Auschwitz I 와 Memorial and Museum Auschwitz II-Birkenau 로 확인하면 된다. 우리가 흔히 아우슈비츠라고 알고 있는 곳은 제1 기념관이다.
파리 신드롬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파리를 동경하는 일본인들이 직접 파리를 보고 실망하여 겪는 감정 상태를 파리 신드롬 혹은 파리 증후군이라고 일컫는다. 아우슈비츠 특히나 아우슈비츠 제1 기념관에서 나는 파리 신드롬을 경험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사진에는 담아내지 못했지만 입구부터 삼엄한 경비에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과 학생들이 수용소를 가득 채웠다. 전시물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건물 안 복도와 방은 가득 찼고 엄청 심란했다. 마치 수학여행 경주를 방불케 했다.
이곳을 방문하려면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자유관람을 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특정시간에만 자유관람이 가능한데 그 이외에는 언어별로 그룹 도슨트가 있다. 그래서 항상 이곳은 인산인해일 것 같다. 가스실도 화장터도 사람들이 많아서 이곳의 을씨년스러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곳은 유대인들이 포화상태로 수용된 곳인데 거꾸로 생각해서 사람들이 많고 복잡하다면 그에 맞추어 느껴볼 생각을 할걸 그랬다. 그렇지만 나는 이날 아우슈비츠가 가장 어떤 수용소보다 별로 었다.
2-5-2. 비르케나우 수용소
자유관람 티켓을 예약을 하면 같은 티켓으로 이곳을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은 부지가 광활해서 다행이었다.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이다.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특징은 내외부를 통과하는 기찻길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이제껏 갔었던 수용소 중에 가장 큰 규모였다.
제1 기념관에서 느낀 실망감을 뒤로한 채 넓디넓은 수용소를 누비며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했다. 신기한 점은 동양인들을 보기가 힘들었다. 흑인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들이었다. 서양인 커뮤니티에서 나치 수용소가 기념비적인 장소인 듯했다. 마치 아시아지역에서 일제 강제수용소나 그런 장소가 있다면 찾아오는 사람들은 응당 서양인보다 동양인이 많을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봐야 할까? 생각해 본다.
그래도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가 가장 별로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어떤 수용소보다 가장 특징이 되는 것은 아마 내 기억으로는 아주 작정하고 대량살상을 하려고 계획된 곳이 이 수용소라고 한다.
3. 마무리
왜 우리가 아우슈비츠를 좀 더 많이 기억하고 있고 알려졌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나치 수용소가 유대인 수용소로 알려진 것도 아우슈비츠의 명성 때문이었다. 나의 지식과 배움이 부족해서 유대민족 말고도 많은 민족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3~4년 전에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 역시 독서모임에서 읽게 되었다. 이 책도 나치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안네의 일기>등 나치의 참혹함을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일상적인 내용들을 담아내 당시에 많은 비판과 외면을 당했다고 한다.
여러 수용소를 다니고 마지막으로 아우슈비츠를 찾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표현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아우슈비츠는 성역화가 된 수용소였다. 물론 충분히 대표성을 띌 만하다고 생각한다. 볼 만한 다른 수용소들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에만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은 의아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죽일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았다. 과연 그들은 어떤 것에 심취해 있었을까? 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 여행을 동행하고 있는 친구를 존중하고 살피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거시적으로 이 민족을 이 나라를 이 지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 지금의 감정이라면 이 친구를 죽여버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본래 여행의 취지와 정말 멀어진 것이다.
나의 욕심은 수용소를 최대한 많이 보는 것과 괴기한 여행테마를 잘 수행하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사학과 출신도 아닌 내가 이렇게 많은 수용소를 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욕심 때문에 여행을 동행한 친구와 불화만 일으키게 되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겠다고 결심한 나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참 욕심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었다. 친구에게 여행 내내 히스테리 부린 게 너무나도 미안하다. 역시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여행이었다.
급하게 탈고하는 바람에 저질로 마무리 된 글이 너무 부끄럽다, 여유롭게 시간을 가지고 일찍 쓸 걸 그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실망
가까운 사람부터 잘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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