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인문학/독후감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살아가기“ 『외젠 이오네스코 - 코뿔소』

소한초이 2025. 3. 22. 22:40
반응형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보며 계속 본질에서 벗어나려는 흐름이 느껴졌다. 마치 말장난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각 인물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건을 다르게 바라보고 있었고, 말장난은 노신사와 논리자학자의 대화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그들은 고양이 다리를 예로 들어 삼단논법을 나누며 논리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 안에는 중요한 것을 외면하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두 번째 코뿔소가 나타났을 때, 주부의 고양이가 죽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지나간 코뿔소가 뿔이 하나인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두 개인 아시아 코뿔소인지에 대한 논쟁에만 몰두했다.

정작 위로받고 관심받아야 할 주부의 슬픔은 외면되었다.
그 와중에 가게 주인이 한마디 한다.
“논리 이전에 중요한 건 고양이의 죽음이다.”
이 장면은 1막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암시해주는 듯했다.



2막 1장에서는 “코뿔소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두고 또다시 논쟁이 벌어진다. 1막과 똑같이, 본질은 사라지고 각자의 논리와 시선만 남는다.

코뿔소가 계단을 부쉈을 때, 파피용은 계단 상태에만 관심을 가지며 걱정하고, 베랑제는 뿔이 하나였는지 두 개였는지가 더 궁금했다.

보타르와 뒤다르는 서로 가치관이 달라서인지, 코뿔소가 등장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말싸움에 집중한다.
보타르는 언론을 불신하고, 코뿔소의 존재 자체를 선동이라 믿는다. 심지어 뵈프가 코뿔소로 변했는데도 그는 해고 절차가 문제라며 본질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


2막 2장에서 베랑제는 장에게 사과하기 위해 병문안을 간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대화가 오가는 듯했지만, “안색이 안 좋다”는 베랑제의 말에 장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대화는 또다시 틀어진다. 베랑제는 장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오해하게 되고, 결국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3막에서는 이 장면이 반복된다. 장과의 관계처럼 이번엔 뒤다르가 베랑제를 찾아오고, 베랑제는 똑같이 받아친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코뿔소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베랑제는 외로움과 고립감에 흔들리고, “나만 뿔이 없다는 것”에 소외감을 느끼며 결국 자신도 코뿔소가 되길 원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며,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회사에는 종종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이 있다. 옳고 그름이 명확한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이 각자에게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판단은 달라진다.

단체생활 속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이익만 얻으려는 사람도 있다. 의견은 말하지 않고 속내는 숨긴 채, 일을 자기 방식대로 조절하며 조용히 이득을 본다. 특히 OT(잔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하고 싶은 사람과 하고 싶지 않은 사람 사이의 의견은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각자 작업을 줄이거나 늘려가며 눈치 싸움을 하게 된다. 혼자 하는 일이라면 괜찮지만, 팀 단위 업무에서는 결국 문제가 생긴다.



나의 상사는 매번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윗선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표현을 쓴다.
마치 소설 『파수꾼』의 이리떼처럼 말이다.
주변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는 식으로 말하며 우리를 제약하고 통제하려 한다.
그 말이 실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말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행동의 폭을 제한받는다.



정치도 비슷하다. 우리는 흔히 경상도는 보수, 전라도는 진보라고 단순하게 나누지만, 그 이면에는 감정과 상처, 기억이 있다.

6·25 전쟁에서 미군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면 반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고,
공산당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면 보수적인 성향이 생길 수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면 정부에 대한 반감이 생길 수 있다.

이처럼 사람마다 다른 역사와 감정이 있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당연히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다름을 이해하기보다, 확증편향 속에서 “내가 맞다”는 믿음에만 갇혀버리곤 한다.



회사생활을 하며 나도 직장 상사를 미워해봤고, 속으로 욕도 해봤고,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욕도 해봤다. 하지만 그동안 독서모임을 통해 꾸준히 책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지고자 노력하고 있다.

어떤 감정이나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왜 저럴까?”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라고 먼저 생각해보려 한다. OT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도 각자의 처지 때문이겠지, 그렇게 이해하려고 노력해봤다.

물론 그게 내게 손해로 다가오면 관대해지기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내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되기도 했다. 결국 핵심은 욕심이다. 타인의 욕심을 내가 없앨 수는 없지만, 내 욕심은 조절할 수 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다잡고 나면, 예전보다 타인을 수용하는 일이 조금은 쉬워진다.



가끔 상상해본다. 만약 회사에서 코뿔소가 등장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50대 과장님들은 모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 시작할 거다.

이야기는 점점 출신 지역, 정치색, 연고주의, 학벌주의, 자식 자랑으로까지 번질 것이다.

결국 정작 중요한 ‘코뿔소’는 사라지고, 남는 건 서로 힐난하는 모습뿐일지도 모른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시국이 어려운 요즘,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보다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 하나를 더 떠올리는 것이, 우리가 서로를 더 건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시작이 아닐까 싶다.

반응형